신현웅 웅진재단 이사장, 前 문화체육부 차관
신현웅 웅진재단 이사장, 前 문화체육부 차관 |
자연사박물관은 단순히 ‘돌과 뼈’를 모아둔 곳이 아니다. 인류 문화유산과 자연과학 유산을 체계적으로 수집, 보존, 전시해 인류와 자연의 역사와 원리를 연구하는 종합 박물관이다. 대표적인 국가 지식 인프라로 한 나라의 문화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안타깝게도 ‘선진국 클럽’인 OECD 회원국 중 유일하게 제대로 된 국립자연사박물관이 없는 나라다. 프랑스는 1631년 파리 국립자연사박물관을 설립했고 영국은 1683년 옥스퍼드대 애슈몰린 자연사박물관을 대중에 공개했다. 반면 우리 정부는 1995년에야 국립자연사박물관 건립 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하지만 이후로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예비 타당성 조사조차 마무리하지 못한 채 답보 상태다. 세계 10위권 경제 규모를 가진 나라에 국립자연사박물관이 없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다.
미국 시카고 필즈 자연사박물관에 전시 중인 스피노사우루수의 골격 화석./필즈 자연사박물관 |
필자는 영화 ‘박물관은 살아 있다’의 배경으로 잘 알려진 미국 자연사박물관을 이틀간 관람했다. 뉴욕의 관광 명소인 이 박물관은 무려 3200만 점의 방대한 소장품을 자랑하는 세계 최대 자연사박물관이다. 이곳은 1869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대통령의 부친인 루스벨트 시니어와 금융가 JP 모건 등 20여 명이 후손을 위한 지식 유산을 남기겠다는 뜻을 모아 설립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자연사박물관 관람 도중 수백 명의 학생이 천문관과 빅뱅전시관에서 별의 탄생과 충돌, 빅뱅과 우주여행을 360도 파노라마 영상으로 체험하는 모습을 봤다. 박물관에서 경이로운 세계를 직접 보고 듣고 질문하며 배우는 이러한 경험은 청소년들에게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과학적 사고와 호기심을 키우는 출발점이 된다. 자연사박물관이 ‘살아 있는 교과서’라 불리는 이유다.
이 장면은 얼마 전 어린이날 손자들과 함께 방문했던 대전 국립중앙과학관 천체관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큐레이터가 천장에 그려진 별들을 가리키며 설명하는 방식은 열정적이었다. 하지만 체험의 깊이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미국 청소년이 3차원 체험형 천체 교육을 받고 있다면, 한국 청소년은 여전히 설명 위주의 1차원 교육에 머물러 있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드론 시범장에서도 시연 관람을 넘어 아이들이 직접 드론을 조종해 볼 수 있었다면 교육 효과는 더 컸을 것이다.
자연사박물관은 단순한 전시 공간이 아니라 콘텐츠의 원천이다. 한반도의 고생물, 지리, 광물, 생태 표본을 수집해 연구하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자연유산은 곧 문화 주권으로, 이를 기반으로 고생물학자, 생물학자, 조류·곤충학자, 광물학자, 우주과학자 등 미래 세대의 과학 인재가 자라난다. ‘쥬라기 공원’을 쓴 작가 역시 자연사박물관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지금까지 생의학·물리·화학 분야에서 노벨상 수상자 27명을 배출했다. 광복 80년이 지났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기초과학 인프라 없이 과학 강국을 기대하는 것은 요행에 가깝다.
문화와 과학의 축적은 단기간에 이뤄지지 않는다. 방만하게 집행되는 일부 분야의 예산을 절감해 국립자연사박물관을 세운다면 그것이야말로 미래 세대를 위한 선택일 것이다. 문화 강국과 과학 선진국을 말하기에 한국의 자연사 인프라는 크게 뒤처져 있다. 이제라도 정부가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 국립자연사박물관 건립의 첫 삽을 뜨기를 기대한다.
[신현웅 웅진재단 이사장, 前 문화체육부 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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