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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할인받았다는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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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할인받았다는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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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정수기를 알아보기 위해 대형마트를 찾았을 때의 일이다. 예상했던 것보다 가격이 비싸다고 생각하던 차에 매장 직원이 다가와 “지금 사면 할인이 가능하다”며 인심 쓰듯 말했다. 그래도 구매를 망설이자 특정 카드를 사용하면 중복할인이 더해져 반값에 살 수 있다고 했다. 최신 스마트폰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정수기 가격이 순식간에 100만원 아래로 내려왔다.

금액의 차이가 있을 뿐 이런 경험은 흔하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케이크를 사기 위해 찾은 제과점에서는 갖가지 할인혜택을 따져봐야 했다. 통신사 멤버십이 있으면 최소 10%의 할인을 받을 수 있고, 간편결제 플랫폼을 거치면 최대 30%까지 깎아준다고 했다. 케이크를 고르는 것보다 할인혜택을 찾아보는 데 시간이 더 걸릴 정도였다. 할인율도 제법 높아서 멋모르고 제값을 주고 샀다가는 바보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권구성 경제부 기자

권구성 경제부 기자

사려던 제품을 싸게 살 수 있다면 소비자에게는 분명 좋은 일이다. 소비를 하기 전 할인이나 세제혜택을 살펴보는 것 역시 현명한 소비의 일환이다. 하지만 할인이 기본값이 된다면, 애초에 그것이 제값을 했는지부터 따져봐야 한다. 할인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쉬워서다.

통신사 멤버십 앱을 통해 영화표를 예매하면, 영화관을 통해 직접 예매하는 것보다 4000원 남짓 싸게 예매할 수 있다. 통신사가 영화관으로부터 다량의 영화표를 사들인 뒤, 자사의 고객에게 싸게 파는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참여연대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은 이런 할인을 통해 “통신사가 최소 4000원의 이득을 남기고 멤버십을 유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영화표에는 할인을 위한 거품이 상당 부분 끼어 있는 셈이다.

수년 전 시행됐다가 이제는 유명무실해진 이른바 단통법(이동통신단말장치 유통구조 개선에 관한 법률)은 휴대전화 가격 교란을 제한하는 데 목적이 있다. 출고가가 정해진 휴대전화를 누군가는 제값에, 누군가는 싸게 사는 것을 차단하기 위함이다. 뭐든 싸게 사면 좋다는 생각을 가지기 쉽지만, 보조금을 부담한 통신사는 결국 다른 수단으로 비용을 충당하는 수밖에 없다.

휴대전화처럼 거래가 활발한 제품은 부담을 전가시키기 쉽지만, 사양산업의 제품이라면 할인이 시장 전체를 잠식할 수 있다. 도서정가제가 대표적이다. 온라인 서점의 등장으로 인한 대형 서점과 대형 출판사의 가격경쟁은 소형 출판사나 동네 서점의 생태계 붕괴로 이어졌다. 그렇게 기반을 잃은 출판시장은 도서정가제를 시행한 뒤에도 전자책과 같은 시장의 변화를 쫓아가지 못하며 도태됐다. 이제는 도서정가제 시행으로 출판시장의 가격경쟁이 사라졌지만, 그동안 경쟁력을 잃어버린 책은 지난해 물가상승률이 0%로 제자리였다.


통상 할인은 제품이나 기술로 치열하게 경쟁하는 시장에선 발생하지 않는다. 시스템반도체가 그렇고 줄을 서서 먹어야 하는 식당들이 그렇다. 반면 가격으로 승부를 봐야 하는 시장에선 할인 경쟁이 치열하다. 통신사나 카드사와의 제휴로 소비자를 유인하고 묶어두는 록인효과를 기대해서다. 소비자는 할인받았다는 착각에 빠지지만, 사실 그 부담은 소비자가 지고 있다.

권구성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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