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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45m 말뚝 박힌 용인 반도체, ‘정치’가 뽑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조선비즈 박성우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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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45m 말뚝 박힌 용인 반도체, ‘정치’가 뽑을 수 있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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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는 진동에 극도로 취약합니다. 15m 말뚝 3개를 이어 45m 길이의 말뚝을 박는 기초공사를 이미 마쳤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장을 옮길 수 있겠습니까.”

지난 7일 만난 이상일 경기도 용인시장의 이 말 한마디는, 최근 정치권 일각에서 제기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호남 이전론’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주장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반도체 공장은 ‘세상에서 가장 예민한 거대 기계’다. 45m 길이의 말뚝을 박는 이유는 단순히 건물을 지탱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머리카락 굵기의 약 10만분의 1 수준인 나노미터(nm·10억분의 1m) 단위의 진동을 억제하기 위한 필수 공정이다.

반도체 제조에 쓰이는 극자외선(EUV·Extreme Ultraviolet) 노광 장비는 0.1nm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설비 가동이나 인력 이동은 물론, 공장 인근 도로를 지나는 차량의 미세한 떨림조차 렌즈 초점을 흐트러뜨려 회로 선폭을 뭉갤 수 있다. 이는 곧 수율(완성품 중 양품 비율) 저하와 막대한 손실로 이어진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기초 말뚝은 한 번 시공하면 되돌릴 수 없다”며 “이미 공사가 진행된 상황에서 이전을 논의하는 것은 돈과 시간을 버리는 일”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정치권에서는 “전기가 풍부한 남쪽으로 가면 된다”는 식의 단순 논리가 나온다. 그러나 반도체는 전력의 ‘양’보다 ‘질’이 생명인 산업이다. 전압이나 주파수가 0.01초만 흔들려도 공정이 멈추고, 수천억 원어치 웨이퍼를 폐기해야 한다. 기상 조건에 따라 출력이 달라지는 재생에너지는 보조 수단일 뿐, 24시간 안정성이 필수인 반도체 라인의 주 전원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더 큰 문제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단계에 들어선 국가 전략 사업을 정치적 구호로 흔들고 있다는 점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참여하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는 총 1000조원이 투입된다. SK하이닉스 일반산단은 이미 첫 번째 팹(Fab·반도체 제조 공장)이 착공됐고, 산단 조성 공정률은 70%를 넘었다. 삼성전자의 국가산단도 토지 보상이 20%를 넘기며 착공을 앞두고 있다. 이 시점에서 이전이나 분산을 거론하는 것은 사업 지연을 넘어, 글로벌 반도체 경쟁에서 스스로 이탈하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대만·미국·일본은 막대한 보조금과 정책 지원을 앞세워 속도전을 벌이고 있다. 일본 구마모토의 TSMC 파운드리 공장은 28개월 만에 완공됐다. 우리만 내부 정치 논쟁에 발목을 잡힌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입지 조건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용인은 팔당댐 용수 공급 계획이 이미 확정됐지만, 새만금으로 이전하려면 충주댐에서 관로를 새로 깔아야 한다. 해수 담수화가 대안으로 거론되지만, 막대한 비용과 전력 소모는 곧바로 경쟁력 저하로 이어진다.

무엇보다 반도체의 핵심은 ‘사람’과 ‘생태계’다. 석·박사급 인재와 수천 개 협력사, 글로벌 장비 기업이 얽혀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는 데는 수십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기업들이 오랜 고민 끝에 내린 선택의 결과다.

지역 균형 발전은 포기할 수 없는 과제다. 그러나 해법은 이미 국가 전략이 확정된 반도체를 흔드는 데 있지 않다. 미래 산업을 중심으로 새로운 성장 축을 만드는 것이 순서다. 지난 8일 대통령실이 “이전을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선을 그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여당을 중심으로 이전론의 여진은 여전하다.


용인 땅에 박힌 45m의 말뚝은 표심이 아니라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의 뿌리다. 정치가 함부로 뽑을 수 있는 말뚝이 아니다.

박성우 사회부장(foxpsw@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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