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중부매일 언론사 이미지

[아침뜨락] 지우지 못한 이름들

중부매일
원문보기

[아침뜨락] 지우지 못한 이름들

서울맑음 / -3.9 °
연하장을 대신한 송구영신 인사가 톡 창 안에서 분주하게 오가는 때이다.

일 년 동안 뜸하던 연락도 이맘때가 되면 용케 길을 잘 찾아온다.

"한 해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새해에도 건강과 평안이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짧은 덕담들 속에는 한 해를 견뎌 온 시간의 무게와 마음의 온도가 담겨 있다.

간혹 영혼 없이 배달되는 단체문자도 있지만, 잊히지 않고 기억된 이름임을 방증하는 것 같아 싫지만은 않다.

일일이 답글을 쓰고, 안부를 물어야 할 사람들을 찾아 인사말을 전하다 보니 어느새 세밑이 세초로 바뀌어 병오년 새해가 밝았다.

아주 오래전 이맘때가 떠오른다.


연말이면 어김없이 새해 다이어리를 준비하느라 문구점을 찾았다.

마음에 쏙 드는 걸 골라 품에 안기라도 하면, 마치 새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기대감에 마음이 설레곤 했다.

매해 지인들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옮겨 적는 일이 번거롭기는 했지만, 새해 첫 의식으로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적어 내려가는 일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한 해 동안의 기억이자, 새로이 이어갈 만남의 설렘 같은 거였다.

지금은 그 모든 것이 손안의 작은 기기로 해결된다.

이름도, 번호도, 대화 기록도.


일일이 인명록을 정리하는 수고가 사라진 지 오래다.

새삼스레 휴대폰의 연락처 목록을 훑어 내려 보았다.

오래된 이름들이 눈에 들어왔다.

몇 년째 통화 기록도, 메시지도 없는 번호들이 의외로 많았다.

만남도 가물가물, 흔적만 남은 인연.

'정리할까' 잠시 망설였지만, 쉽게 삭제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한때는 시간과 마음을 나누던 사이 아니었던가! "언젠가 다시 안부를 묻게 될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래도 함께 했던 소중한 추억인데…" 이러면서 말이다.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난 지인과 식사를 한 적이 있다.

한 달에도 몇 번씩은 만나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던 사이였지만, 한동안 연락이 뜸했었다.

모처럼의 만남임에도 식사 내내 묵혀 두었던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한참 만에 봤는데도 어색하지 않아 너무 좋다." 헤어지며 꼭 잡은 두 손에 얹혀 온 그 말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 건 왜일까.

하버드대의 한 연구에서 인간의 행복을 결정짓는 가장 큰 요인은 돈도 명예도 아닌 '좋은 인간관계'라고 밝힌 바 있다.

관계 만족도가 높을수록 정신적·신체적 건강지수가 높아져 장수의 가능성이 커진다고 한다.

잦은 연락이나 의무적인 만남이 아니라, 편안함과 신뢰로 이어지는 관계 내에서 가능한 일이지 싶다.

연락이 뜸해도 서운하지 않고,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의 형편이 이해되는 사이.

억지로 유지하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만남.

좋은 관계란 그런 것이 아닐까.

나는 지금껏 모든 관계를 같은 온도로 대하려 애쓰며 살았다.

그런 이유로 몸과 마음의 에너지가 방전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좋은 관계로 남고 싶은 욕심이 앞선 탓이다.

지금껏 내 삶의 방식을 크게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이 나이가 되고 보니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관계에 대해 한 번쯤은 돌아볼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수록 인간관계를 줄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젊을 때처럼 많은 사람과의 만남을 갖기엔 제약이 따르기에 나온 말이겠지만, 단순히 손절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관계를 끊어내라'에 방점이 찍히는 게 아니라, 보다 깊이 있는 만남을 통해 정서적 안정감을 찾으라는 뜻인 듯싶다.

올해도 연락처 목록을 과감히 정리하지 못하고 휴대폰을 닫았다.

여전히 누군가의 이름을 삭제하지는 못했지만, 어떤 마음으로 관계를 이어갈 지에 대해 잠시나마 고민해 보는 시간이었다.

지워야 할 이름들을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래도록 따뜻하게 남을 이름을 잃지 않는 일임이 선명해졌다.

오래된 이름들 사이에 스며있는 시간과 추억을 소중히 여기며 가감이 없는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을 곁에 남기는 것.

그것이야말로 나이 들어가며 배워야 할 관계의 지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김애경 수필가 새해,덕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