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8일 밤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얍 판 츠베덴이 지휘한 서울시향의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이 마지막 D장조 화음에 도달했을 때, 객석의 반응은 하나로 모이지 않았다. 곧바로 옆자리에서 기립 박수가 이어졌지만, 잔향이 채 가시기 전 통로로 향하는 발걸음도 눈에 띄었다. 커튼콜을 제외한 연주 길이는 약 59분. 문제는 이 숫자가 빠르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이 속도가 청중의 체감과 어떤 방식으로 어긋났는가였다.
‘합창’은 고통과 투쟁을 거쳐 명상에 이르고, 마침내 환희로 풀리는 긴 호흡의 작품으로 기억된다. 이 곡선은 단지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청중이 감정을 축적하고 해소하는 시간의 구조다. 그 호흡이 압축되면 감동이 사라진다기보다 감정이 도착하기 전에 다음 장면으로 밀려난다. 이날 무대는 환희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환희에 도달할 심리적 시간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았다는 인상을 남겼다.
이 빠른 템포를 지휘자의 성향이나 기록 경쟁으로만 읽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츠베덴이 이런 선택을 내놓기까지의 고민 역시 그 자체로 공연의 일부였을 것이다. 베토벤은 ‘알레그로’ 같은 관습적 언어 대신, 각 악장에 분당 박자 수를 명시한 메트로놈 표기를 남겨 자신의 추진력과 호흡을 구체적으로 고정하려 했다. 츠베덴은 그 지시를 하나의 원칙으로 받아들이되, 동시에 현대 오케스트라의 기술과 규율로 그 원칙을 현실화하려 했을 것이다. 즉, 느슨한 타협이 아니라 한 번은 끝까지 밀어붙여 보겠다는 결심에 가깝다.
얍 판 츠베덴 지휘로 서울시립교향악단이 지난달 18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
‘합창’은 고통과 투쟁을 거쳐 명상에 이르고, 마침내 환희로 풀리는 긴 호흡의 작품으로 기억된다. 이 곡선은 단지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청중이 감정을 축적하고 해소하는 시간의 구조다. 그 호흡이 압축되면 감동이 사라진다기보다 감정이 도착하기 전에 다음 장면으로 밀려난다. 이날 무대는 환희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환희에 도달할 심리적 시간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았다는 인상을 남겼다.
이 빠른 템포를 지휘자의 성향이나 기록 경쟁으로만 읽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츠베덴이 이런 선택을 내놓기까지의 고민 역시 그 자체로 공연의 일부였을 것이다. 베토벤은 ‘알레그로’ 같은 관습적 언어 대신, 각 악장에 분당 박자 수를 명시한 메트로놈 표기를 남겨 자신의 추진력과 호흡을 구체적으로 고정하려 했다. 츠베덴은 그 지시를 하나의 원칙으로 받아들이되, 동시에 현대 오케스트라의 기술과 규율로 그 원칙을 현실화하려 했을 것이다. 즉, 느슨한 타협이 아니라 한 번은 끝까지 밀어붙여 보겠다는 결심에 가깝다.
다만 문제는 좌표를 존중하는 것과, 그 좌표가 도달해야 할 결과를 재현하는 것이 동일하지 않다는 데 있다. 여기서 논쟁은 해석의 취향을 넘어 물리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노링턴이나 가디너가 60분 안팎의 ‘합창’을 설득력 있게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은 템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비교적 작은 공간, 빠르게 사라지는 음향, 짧은 서스테인의 악기와 주법이라는 조건 위에서 달렸다. 반면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은 풍부한 잔향을 목표로 설계된 공간이고, 현대 악기는 소리를 길게 유지한다. 이 조건에서 속도가 빨라질수록 앞소리의 여운은 뒷소리를 덮고 음의 경계는 흐려진다. 우리는 ‘너무 빠르다’기보다 ‘겹쳐서 듣는다’는 감각에 가까워진다.
이날 연주도 그 경계를 여러 차례 드러냈다. 대위적 진행이 시원하게 분해되기보다 질감으로 뭉치는 순간이 있었고, 빠른 박동이 만들어내는 긴장과 홀의 울림이 서로를 견제하는 장면이 반복됐다. 느린 악장에서는 위로가 머무를 여백이 다소 촉박하게 느껴졌으며, 피날레에서는 가사의 명료함과 음향의 확산 사이에서 균형이 시험대에 올랐다. 이는 개별 마디의 성패가 아니라, 속도와 공간이 함께 남긴 총체적 체감이었다.
이상권 음악평론가 |
음악은 물리적 시간 위에서 흐르지만, 청중은 심리적 시간 속에서 감동한다. 이 둘을 이어주는 것은 느림이나 빠름이 아니라 명료함과 호흡이다. 속도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관건은 그 속도를 견딜 조건을 얼마나 치밀하게 설계했는지다. 그 기반이 갖춰질 때, ‘합창’의 환희는 연주의 끝에서 갑자기 터지는 환호가 아니라, 긴 여정이 마침내 설득력 있게 완결되는 순간으로 남을 것이다.
이상권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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