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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서 그려진 김환기 ‘무제’…브라질에서 한국으로, 미지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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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서 그려진 김환기 ‘무제’…브라질에서 한국으로, 미지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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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부암동 환기미술관이 ‘김환기와 브라질_새로운 우리의 노래로…’란 제목의 신소장품전을 열어 공개한 김환기의 1960년대 작 ‘무제’. 노형석 기자

서울 부암동 환기미술관이 ‘김환기와 브라질_새로운 우리의 노래로…’란 제목의 신소장품전을 열어 공개한 김환기의 1960년대 작 ‘무제’. 노형석 기자


반세기 전 지구 반대편 브라질로 흘러갔던 거장 화가 김환기(1913~1974)의 그림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한국 추상주의 회화의 선구자이자 우주를 상징하는 말년의 푸른빛 점그림들로 여전히 한국 미술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이 거장이 50~60년 전 브라질에 남겨놓은 그림의 행방이 새해 한국 미술사학계의 또 다른 관심거리로 떠오르는 중이다.



지난 2025년 봄과 하반기 잇따라 김환기의 브라질 출품 인연을 담은 비장품 전시들이 열린 것이 단초가 되었다. 지난해 3~4월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가나문화재단 주최로 열린 ‘김병기 3주기 기념전: 김병기와 상파울루 비엔날레’전에서 김환기가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출품했던 석 점의 ‘메아리(에코)’ 연작들이 처음 공개되었다. 뒤이어, 서울 부암동 환기미술관은 지난해 8월22일부터 ‘김환기와 브라질_새로운 우리의 노래로…’란 제목의 신소장품전(2월1일까지)을 열면서 반세기 동안 브라질의 지인이 소장했다가 지난해 6월 입수한 1960년대 작 ‘무제’를 처음 관객 앞에 선보였다. 환기미술관의 신소장품 ‘무제’는 여러모로 색다른 감상거리다. 1960~70년대 작가의 뉴욕 시절 그림 제자였던 브라질 여성 이베트 모레노가 1975년 김환기의 부인 김향안(1916~2004)한테서 받아 생전 애장품으로 간직해왔던 것이다. 1963년 이후 미국 뉴욕에서 작업한 김환기 작품으로는 보기 드물게 유채물감과 모래를 섞어 작업한 혼합매체 작품이다. 해와 산 등의 1950년대 구상적 요소들이 선과 색면 등의 온전한 추상적 요소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양상을 도드라지게 보여준다. 김향안은 75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에서 그 전해 고인이 된 남편 김환기의 회고 특별전을 열었는데, 당시 현지에서 전시를 도와준 모레노에게 감사의 뜻으로 이 작품을 선물했다고 전해진다. 국내에서는 그동안 이런 사연을 거의 알지못했다가 최근 별세한 모레노 유족들이 환기미술관에 연락하면서 작품의 존재를 알게 됐다고 한다. 브라질에서 미술관으로 돌아온 ‘무제’는 1960년대 후반 작품이다. 뒷면에 ‘Pour le souvenir de Whanki, à Mademoiselle Ivette Moreno, Chère amie de Whanki et Tong./Tong, July 2, 1975 à New York(이베트 모레노에게 주는 환기의 선물, 소중한 친구 환기와 동(김향안의 본명 ‘변동림’의 가운데 글자를 가리킨다), 1975년 뉴욕에서’라는 김향안의 불어 친필이 적혀있다.



모레노와 김환기·김향안 부부의 인연은 1960년대 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모레노는 뉴욕에 파견된 브라질 은행 지점 직원이었다. 현지 김환기의 작업실을 다니면서 그림을 배웠다. 김향안은 “자국 은행을 다니면서 쉬는 날이면 김환기에게 유화를 배운 유일한 학생”이라 기록했다. 모레노와 관련된 글을 다수 남기면서 김향안은 남편이 별세한 뒤에도 계속 교유를 이어갔다. 1991년 4월25일 기록에는 그와의 인연과 지금의 상황을 다소 긴 문장들로 적어 놓은 대목이 보인다.



‘어제는 이베트 모레노가 찾아왔다. 15년 만에…브라질 태생인데 저희 나라 은행에서 일하면서 토요일마다 그림 공부를 하러 왔었다. …1975년 상파울루 김환기 회고전 때는… 내가 간다니까 자기 나라 은행에 소개해서 상파울루공항에 내리니까 은행에서 두 소녀가 꽃다발을 들고 마중을 나와 주었다. 초행인 나에게 길 안내부터 모든 심부름을 해주며 도와주었다. 그 모레노가 어머니가 편찮다고 고향에 간 지가 여러 해 되었다.



가끔 편지가 오고, …수화 그림은 좋은 자리에 걸려 있으며 모두들 좋아한다고 사연이 길었다…86년부터인가…리오(Rio de Janeiro)로 다시 이사했다는 소식 후 편지가 안 왔다. 어제 갑자기 뉴욕에서 전화가 왔다. 온 지 두 주일이 되었고 내일모레 떠나는데 내일 꼭 만나고 싶다고 한다. 물론 나는 반가워서 오랄 수밖에. 모레노는 10년이 아래인데 나와 비슷하게 늙었다. 반가워서 내 볼에 루즈를 묻히면서 수선을 떠는 것은 예나 다름없는 모레논데 어딘지 사람이 탄력이 없고 힘이 없어 보였다.’



이후 연락이 영영 끊긴 모레노는 김향안의 타계 16년 뒤인 2020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족인 조카들은 유품을 정리하다 생전 숙모가 아끼며 보관했던 김환기 그림 석 점을 발견한다.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 2023년 환기미술관에 이메일을 보내어 처분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조카 한명이 한국까지 찾아와 협의한 끝에 미술관 쪽은 지난해 6월 ‘무제’ 한점과 1960년대 상파울루 전시 리플렛 등 아카이브 자료들을 사들였고, ‘무제’를 이번 전시에 내보이게 됐다. 50여년 전 뉴욕에서 삶의 마지막을 불태우며 우주를 그렸던 거장 김환기와 브라질 제자가 맺었던 희미한 인연의 자취가 영영 묻힐 뻔했다가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작품을 통해 되살아난 셈이다.





1963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한국관에 내걸린 자신의 출품작 ‘섬의 달밤’ ‘운월’ 앞에서 비엔날레 창립자 치칠로 마타라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김환기 작가. © Fundação Bienal de São Paulo 환기미술관 제공

1963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한국관에 내걸린 자신의 출품작 ‘섬의 달밤’ ‘운월’ 앞에서 비엔날레 창립자 치칠로 마타라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김환기 작가. © Fundação Bienal de São Paulo 환기미술관 제공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브라질은 김환기가 삶의 후반기 공들여 작품의 인연을 심었던 나라였다. 상파울루 비엔날레 덕분이었다. 1951년 창설된 이래 제3세계 변방과 서구 예술가들이 어울리는 마당으로 진보적 흐름의 미술담론과 작품들을 내놓았던 이 격년제 국제미술제는 당대 베네치아 비엔날레와 쌍벽을 이루며 한국 미술의 가장 유력한 국제진출 창구가 됐다. 1963년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맡아 미술판 실력자가 된 김환기는 그해 7회 비엔날레에서 한국관 전시를 총괄하는 커미셔너가 됐다. 당시 유영국, 김영주,김기창, 유강열, 한용진, 서세옥과 함께 참여작가로도 나가 ‘섬의 달밤, ‘운월’, ‘여름 달밤’을 출품하면서 한국 작가로는 처음 명예상을 받았다. 뒤이어 1965년의 8회와 작고 뒤인 1975년의 13회 때도 각각 14점과 50점을 낸 특별 전시를 잇따라 열면서 국제적 작가의 면모를 닦았다. 특히 1963년 처음 출품해 명예상까지 받은 7회 비엔날레는 김환기 화력의 결정적 전환점이 된다. 선과 원형의 환각적 이미지를 담은 추상표현주의 작가 아돌프 고틀리브의 대상 수상작들을 보며 감동을 한 그는 귀국하지 않고 고틀리브 근거지인 미국 뉴욕으로 아예 작업 기반을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김환기는 당시 감흥을 이렇게 기록했다.



“대상을 받은 아돌프 고틀리브는 참 좋겠다. 미국에서 회화는 이 한 사람만 출전시켰다. 작은 게 백 호 정도고 전부가 대작인데 호수도 따질 수가 없었다. 모두 벽만큼씩 해서, 이런 대작품들을 46점이나 꽉 걸었으니 그 장관이야말로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양(量)뿐 아니라 내용도 좋았다. 내 감각과 동감되는 게 있었다. 퍽 애정이 가는 작가였다. …어제 전체를 둘러보고 내 그림 앞에 가서 나는 많은 것을 생각했다. 내 예술도 의미가 있다는 자신을 얻었다. 아름다운 세계다. 단지 나는 시골(한국)에 살았다는 것밖에 없다.”(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환기재단, 2005).



1963년 김환기가 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명예상을 수상했을 당시 출품작 ‘섬의 달밤’. 1959년 그린 작품이다. 환기미술관 수향산방에서 열리고 있는 신소장품 기획전 ‘김환기와 브라질’에 나왔다. 노형석 기자

1963년 김환기가 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명예상을 수상했을 당시 출품작 ‘섬의 달밤’. 1959년 그린 작품이다. 환기미술관 수향산방에서 열리고 있는 신소장품 기획전 ‘김환기와 브라질’에 나왔다. 노형석 기자


그는 출장보고서만 국내에 제출한 채 전시 뒤 곧장 뉴욕으로 날아가 버렸다. 이후 록펠러재단 지원 아래 뉴욕에 정착해 고틀리브와 교유하면서 70년대 초 푸른 점화로 이어지는 우주적 화풍의 기틀을 닦게 된다. 서로 건강을 걱정하며 그림 세계를 소통했던 두 작가는 공교롭게도 1974년 같은 해에 삶의 마침표를 찍었다. 지금 서울 한남동 페이스갤러리에서 1960~70년대 고틀리브의 당대 그림들과 김환기의 뉴욕 시기 점선 그림들을 처음 한자리에 모은 2인전 ‘추상의 언어, 감성의 우주’(10일까지)가 열리고 있어 화풍의 친연성을 살필 수 있다.



(2편으로 이어짐)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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