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9일(현지시간)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특별군사작전’(러시아 정부가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을 일컫는 표현)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종전방안을 두고 회담한 지 하루 만에 러시아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관저가 공격당했다’고 주장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의 전형적 거짓말”이라고 반박했지만, 전날 회담으로 동력을 이어가려던 종전 협상에 러시아가 찬물을 끼얹은 모양새가 됐다.
29일(현지시간) 타스통신 등에 따르면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교장관은 이날 기자들에게 우크라이나가 노브고로드주에 있는 푸틴 대통령 관저에 장거리 무인기(드론) 공격을 시도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공격을 “우크라이나의 테러 행위”로 규정하고 “러시아는 협상 입장을 재검토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을 구실 삼아 러시아는 종전 협상에서 사실상 이탈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는 위험한 발언으로 트럼프 대통령과 (우크라이나가) 외교적 노력으로 이뤄온 진전을 훼손하려 한다”며 러시아의 주장을 즉각 반박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추가 공격을 정당화하고, 전쟁 종식에 필요한 조처를 하지 않겠다는 러시아의 태도를 정당화하기 위한 완전한 날조”라고 주장했다.
미국과 우크라이나가 전날 정상회담에서 종전방안에 의견 일치를 이룬 듯한 모습을 보이자 러시아가 국면 전환을 노린 꼼수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러시아의 주장에 대해 “이 같은 호전적 위협은 러시아 국민과 백악관을 겨냥한, 옛 소련 정보기관 KBG식 정보 공작의 일환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우)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좌)이 지난 28일 미국 플로리다주 팜비치 마러라고 자택에서 회담을 위해 만나고 있다. AFP연합뉴스 |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푸틴 관저 공격설을 두고 공방을 벌이는 상황에서 러시아 편을 드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유리 우샤코프 크렘린궁 외교정책 보좌관은 이날 푸틴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과 통화하면서 관저가 우크라이나 드론 공격을 받은 사실을 알렸고, 트럼프 대통령이 충격받아 분노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와 관련한 취재진 질문에도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러시아가 공세를 계속하고 있으니 우크라이나도 공세에 나설 순 있지만, 그(푸틴)의 집을 공격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지금은 그런 짓을 할 적절한 시기가 아니다”고 말했다. 러시아 측 주장에 근거가 있냐는 질문에는 “공격이 없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푸틴 대통령이 나한테 그렇게 말했다”며 “(미 정보기관이 근거를) 찾아낼 것”이라고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종전 협상의 동력을 꺼뜨리진 않으려는 듯 격한 표현을 피했지만, 우크라이나와 유럽 국가들이 그동안 떨치지 못한 ‘트럼프 불신’은 다시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와 유럽 국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언제 또다시 러시아를 일방적으로 두둔하고 나설지 알 수 없다는 우려를 품어왔는데, 명확한 근거 없이 제기된 ‘푸틴 관저 공격설’에도 단번에 러시아 편에 섰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날 젤렌스키 대통령과 회담에서도 “푸틴도 우크라이나 재건을 원한다” “우크라이나 영토가 점령될 수 있는데 지금 협상하는 게 더 낫지 않나” 등 사실상 러시아 입장을 옹호하는 발언을 이어갔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우크라이나와 유럽 동맹국은 치밀한 외교적 노력에도 트럼프가 완전히 같은 편에 서 있다고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젤렌스키의 최우선 목표는 트럼프가 푸틴 편에 서는 것을 막는 일이지만, 이는 사실상 (바위를 끝없이 언덕 위로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의 형벌과도 같다”고 짚었다.
유럽연합(EU) 국기 앞에 놓여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3D프린팅 모형. 로이터연합뉴스 |
이번 사태는 종전 협상에 또 다른 불확실성을 더하는 동시에 트럼프 정부가 주도하는 종전 협상의 취약성을 드러냈다는 분석도 나온다. 전날 미·우크라이나 정상회담은 핵심 쟁점에서 거의 진전이 없었다는 평가가 뒤따르는 상황에서, 러시아가 협상과 더 멀어지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러시아의 주장은) 우크라이나를 평화의 걸림돌로 묘사하는 데 열을 올리면서, 푸틴 대통령이 내세워온 ‘타협 없이 최대한 요구하려는 입장’으로 되돌아갈 준비가 돼 있음을 시사한다”고 전했다.
러시아 정치 분석가 게오르기 보프트는 “러시아군이 일부 점령한 우크라이나 자포리자, 헤르손 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영유권 주장을 확대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크렘린궁 고위 지휘관들과 회의에서 “돈바스, 자포리자, 헤르손을 해방하는 목표가 ‘특별군사작전’ 계획에 따라 단계적으로 수행되고 있다”고 과시하기도 했다.
김희진 기자 h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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