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기 시인·칼럼니스트·시사평론가 |
2025년의 마지막 페이지에 서면, 우리는 늘 비슷한 질문 앞에 멈춘다. 무엇이 바뀌었고, 무엇은 끝내 바뀌지 않았는가. 정치는 새로움을 말했고 제도는 개혁을 약속했지만, 우리의 뿌리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맴돈다.
한 해의 끝에서 고대사를 꺼내는 이유는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다. 지금까지 무엇을 외면해 왔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한국 사회에서 고대사를 말하면 반드시 등장하는 말이 있다. ‘환빠’, 그리고 ‘식빠’다. 이 두 단어는 토론을 시작하기 위해 쓰이지 않는다. 토론을 끝내기 위해 쓰인다.
누군가 환국과 단군조선의 상고사를 담은 <환단고기>나 단군의 계통과 고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단군세기>를 언급하면 '환빠'라는 낙인이 찍히고, 식민사관의 형성 과정을 비판하면 '식빠 몰이'라는 반격이 돌아온다. 이 싸움이 반복되는 동안 정작 책임을 져야 할 주체들은 언제나 조용하다. 정치권과 제도권 학계다.
먼저 학계를 보자. 일제강점기 조선사편수회에서 출발한 역사 서술의 틀은 해방 이후에도 완전히 해체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중심에 섰던 인물이 이병도를 비롯한 실증사학 계열이라는 점은 이미 학계 내부에서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병도 자신도 말년에 “한국사의 반절과 판도의 대부분이 잘려 나갔다”고 인정한 바 있다. 그러나 이 고백 이후 학계는 무엇을 했는가. 체계적 재검토도, 공개적 재논쟁도 없었다. 불편한 질문은 비주류·비학문이라는 이름 아래 밀려났다.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 <환단고기>로 이어지는 사서 체계가 정통사인가 아닌가는 학문적으로 다퉈야 할 문제다. 그러나 한국 학계는 검증 대신 배제를 택했고, 공개 토론 대신 ‘언급 금기’와 ‘신앙 프레임’으로 질문을 봉인해 왔다. 이는 학문의 태도라기보다 권위를 관리하는 방식에 가까웠다.
이 지점에서 하나의 역설이 발생한다. 국가와 학계가 외면한 기록을 고성이씨 문중이라는 특정 가문이 600년 넘게 전승·보존해 왔다는 사실이다. 행촌 이암, 일십당 이맥, 해학 이기, 운초 계연수, 한암당 이유립으로 이어지는 계보는 신화가 아니라 문헌과 필사본, 실명과 연대로 남아 있다.
기록의 내용 이전에, 우리는 먼저 이 질문을 해야 한다. 왜 국가가 해야 할 일을 한 집안이 대신했는가.
정치권의 책임은 여기서 더욱 분명해진다. 이재명 대통령이 ‘환빠’라는 표현을 언급한 것도 특정 역사 해석에 대한 입장 표명이 아니라, 상고사 논쟁이 학문적 검증보다는 낙인과 조롱의 프레임으로 소비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한 발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해방 이후 어느 정부도, 어느 국회도 민족 상고사 전반에 대한 국가 차원의 종합 재검토 기구를 만든 적이 없다. 보수 정부도, 진보 정부도 마찬가지다. 정치권은 늘 “역사는 학계의 문제”라고 말해 왔다. 그러나 학계가 닫혀 있을 때, 정치는 그 책임을 사실상 내려놓은 셈이 된다.
최근 정치권의 태도도 선택적이다. 고대사 문제는 외교·안보 국면에서만 호출되고,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고구려사 편입 문제에는 성명을 내면서도, 우리 내부의 역사 인식이 식민지 시기의 틀에서 얼마나 벗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이는 신중함이라기보다 편의에 가깝다.
'환빠·식빠’ 논쟁은 이 같은 침묵을 유지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장치다. 논쟁이 격화될수록 질문은 조롱과 낙인 싸움으로 분산된다. 그 사이 정치권은 책임에서 비켜서고, 학계는 답하지 않아도 된다. 조롱은 방패가 되고, 침묵은 특권이 된다. 이 대통령이 ‘환빠’ 발언을 한 지 2주가 지났는데도. 정작 제도와 학계는 조용하다.
여기서 시선을 교육과 제도로까지 넓힐 필요가 있다. 공교육과 교과서는 오랫동안 상고사 문제를 ‘논쟁적 영역’으로 분류해 왔다. 이는 중립이라기보다 판단 유보에 가깝다. 질문이 제기되지 않는 구조 속에서 학생들에게 민족의 기원은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회피의 영역으로 남았다.
국가 차원의 체계적 검토가 없었고, 학계의 논쟁도 공개적으로 축적되지 못했다. 그 공백을 개인과 문중의 기록이 메워왔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특정 기록의 진위를 떠나, 국가와 제도가 역사 인식의 책임을 얼마나 오랫동안 미뤄왔는지를 되묻게 한다.
고성이씨 문중의 전승사가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국가가 흔들릴 때, 제도보다 먼저 사라지는 것은 역사를 대하는 책임감이다. 그래서 역사는 국가 문서고가 아니라 개인의 서랍 속으로 숨어든다. 이것은 미담이 아니다. 국가 기능의 공백이 남긴 결과다.
이런 문제의식은 특정 문중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세지홀딩스 정홍술 회장 역시 최근 대화에서 “동래정씨는 전라도 관찰사와 대제학 등 나라의 재상 16인을 배출한 집안이고, 학자도 많은 가문인데 관련 기록물과 문헌을 국가가 아니라 종친회 차원에서 보관·관리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정 회장은 “고성이씨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마 다른 종친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 발언은 개인적 소회가 아니다. 조선과 대한제국, 그리고 근현대 국가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국가가 축적하고 관리했어야 할 역사적 기록과 계보, 문헌 상당수가 여전히 사적 영역에 머물러 있다는 구조적 현실을 정확히 짚는다.
불원재(不遠齋)는 "근본은 멀리 있지 않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고성이씨 재실이다.
불원재는 단순한 이름이 아니다. 유교 전통에서 재(齋)는 머무는 공간이자 마음을 가다듬는 자리며, 학문과 성찰이 동시에 이뤄지는 장소를 뜻한다. 서원이 그랬고, 사가의 재실이 그랬다. 불원재라는 이름은 “근본은 멀리 있지 않다”는 의미를 넘어, 멀리 가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붙들어 두는 태도의 언어에 가깝다.
새로운 진리를 찾기 위해 먼 곳을 헤매기보다, 이미 손에 쥐고 있으나 외면해 온 기록과 질문 앞에 다시 앉으라는 요청이다. 이 이름이 국가의 제도 공간이 아니라 한 문중의 재실에 붙어 있었다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공적인 검토가 사라진 자리에 사적인 책임이 남았고, 비어 있던 제도의 책무를 개인의 재실이 대신해 왔다는 뜻이다.
2025년의 끝에서 다시 묻는다. 우리는 얼마나 멀리 와 있는가. 그러나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근본은 멀리 있지 않다. 환국과 배달이라는 환단고기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질문을 피하고 책임을 미뤄온 우리의 태도에 있다. 학계는 질문을 닫았고, 정치는 책임을 넘겼다. 그 사이 역사는 개인의 서랍 속으로 물러났다.
역사는 믿으라고 존재하지 않는다. 덮으라고 존재하지도 않는다. 검토하고, 논쟁하고, 계승하기 위해 존재한다.
고성이씨 문중이 600년 동안 해온 일은 믿음의 강요가 아니라 기록의 보존이었다. 국가가 해야 할 최소한의 역할을 대신했을 뿐이다. 그 사실이 오늘 우리에게 불편하다면, 불편함의 대상은 기록이 아니라 그 책임을 미뤄온 국가와 제도일 것이다.
한 해의 끝에서 다시 확인한다. 근본은 멀리 있지 않다. 지금 우리의 태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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