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과 자긍심. 일라이 클레어 지음, 전혜은·제이 옮김, 현실문화, 1만6000원 |
1년에 한두번 통화할 때면 둘째 삼촌은 꼭 묻는다. “올해는 산천어 축제 올 거지?” 삼촌에게 이 질문은 조카에게 건네는 초대장이자, 마을에서 자신의 기여를 드러내는 자부심이다. 서른까지 강원도 춘천에서 살았던 나는 중학생 때부터 겨울마다 그곳에 갔다. 화천 인근 원천리, 대성리 등에 살았던 친구들의 친척들 역시 행사와 관련된 노동을 했다. 우리는 시골 사람들이 이룬 대표적 성과로 불리던 그곳에서 차곡차곡 추억을 쌓았다. 딱딱한 얼음을 발밑으로 느끼고, 장갑 낀 채 서로의 손을 잡으며, 산이 빙 둘러싼 경치와 하얀 하늘, 입김의 모양을 즐겼다.
추억을 회상하던 자리에서 마음이 불쑥 복잡해진다. ‘삼촌, 산천어 축제는 인간에게 축제일 수 있어도, 산천어에겐 대량 학살의 현장이라는 사실을 아시나요?’ 차마 뱉진 못한 채 속으로만 웅얼거린다. 내 몸에 각인된 살아 있는 기억과 뒤늦게 알아차린 (살아 있던 생명의) 죽음이, 같은 공간에서 뒤엉킨다. 비수도권 시골 주민에게 활기를 불어넣은 노동을 매도하지 않으면서, 생명을 학살하지 말자는 구호는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그 축제로 가장 이득을 보는 이들(돈과 명예가 쏠리는 지자체장과 행사 주최자)을 향해 정확하게 비판하는 일은 가능하다. 그렇다면 행사에 다양하게 얽힌 이들을 비껴 가며, 주체를 향한 날카로운 비판만을 유지할 수 있을까? 산천어 축제뿐 아니라, 비인간 동물을 대상으로 하는 온갖 축제라는 이름의 학살 앞에 설 때마다 복잡해지는 이유다.
일라이 클레어의 ‘망명과 자긍심’을 읽은 수년 전, 복잡한 심경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힌트를 얻었다. 나는 시골에서 자란 엄마와 가족의 영향을 받았고, 그곳을 떠나며 정치적 신념을 배울 여러 기회를 가졌다. 기독교 집안의 보수성을 그대로 흡수한 큰삼촌은 미워했지만, 평생 자동차를 몰거나 해외여행 한번 다녀오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다니며 농사와 산불 지킴이를 해온, 어떤 면에서는 매우 생태적인 삶을 살아온, 둘째 삼촌의 영향을 받아 왔다. 그 삼촌이 아끼는 ‘문제적’ 축제 앞에서, 나는 단순한 표어를 내밀 수 없어 그저 등을 돌려왔다.
돌린 등을 다시 돌린다. 산천어 축제가 낙후된 시골이어서 생긴 재앙이자 악의 축제에 불과하다는 단순한 구호를 마주할 때, 축제에 동원된 지역 주민을 생각 없는 순진한 존재로 여길 때, 나는 화가 난다. 산천어 수만마리가 끔찍한 환경에서 길러지고 이곳저곳이 찢기며 고통 속에서 생을 마감하는 장면을 떠올릴 때, 또 다른 분노가 치민다. 불안정 단기 일자리를 앞세워 ‘인간 동물’ 대 ‘비인간 동물’의 구도로 본질을 흐리려는 화천군의 모략에도 마찬가지다.
나는 두개의 분노를 함께 잡고, 복잡한 분노를 쓸 수밖에 없고, 써야 한다. 일라이 클레어가 지적했듯, 분노가 죄책감에 머물게 허락하면 안 된다. 미로처럼 얽힌 폭력의 세계에서 책임질 끈질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도시에 사는 나는 살생이 가능하게끔 허용한 자본, 비인간 동물 억압의 역사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
다시 등을 돌린다. 이 글을 쓰기까지 네번의 겨울이 지났다.
집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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