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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로봇마저 풍만한 가슴? 가부장제 투영된 휴머노이드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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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로봇마저 풍만한 가슴? 가부장제 투영된 휴머노이드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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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신이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다고 말한다. 인간은 자기 형상을 본떠 로봇을 창조했다. 영어 단어이지만 보편 용어가 된 ‘로봇(Robot)’은 체코어 ‘로보타’(robota, 힘들고 단조로운 일을 하는 노동자)에서 유래했다. 체코 극작가 카렐 차페크가 1920년 발표한 공상과학 희곡 ‘아르. 유. 아르(R.U.R.)-로줌의 유니버설 로봇’에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는 인조인간을 가리키는 신조어로 등장했다. 이후 한 세기가 채 안 돼 꿈같은 상상은 일상의 현실이 됐다.



‘로보 사피엔스 재패니쿠스’(2018, 원저 제목도 같다)는 미국 인류학자이자 미술사학자 제니퍼 로버트슨이 로봇 선진국 일본의 로봇공학과 산업에 초점을 맞춰 인간과 기술의 바람직한 관계를 사유한 책이다. 로버트슨은 일본 사회의 뿌리 깊은 젠더 규범, 가족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비장애인 중심주의를 성찰하며 로봇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사회문화적 질문을 던진다. 이는 일본뿐 아니라 기술공학과 인공지능의 결합 시대를 맞는 인류 모두의 문제다.



로보 사피엔스 재패니쿠스 . 제니퍼 로버트슨 지음, 이수영 옮김, 조수미 해제, 눌민, 3만2000원

로보 사피엔스 재패니쿠스 . 제니퍼 로버트슨 지음, 이수영 옮김, 조수미 해제, 눌민, 3만2000원


지은이의 이력과 연구 분야가 눈길을 끈다. 1953년생인 그는 대학 학부에서 미술사, 대학원에서 인류학을 공부한 뒤 모교 코넬대를 거쳐 미시간대 교수를 지냈다. 대학에 있으면서 일본학·여성학·역사학·미술디자인·로봇공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와 교육을 이끌었다. 태평양 전쟁 종전 이후 일본의 고도성장기에 도쿄 근교에서 유년과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을 포함해, 20년 이상 일본에서 거주하며 전후 반세기 일본의 변모를 지켜봤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시각인류학, 도시 연구,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젠더와 섹슈얼리티, 우생학과 생명윤리, 로봇공학, 일본 현대 미술과 대중문화, 박물관 등 폭넓은 영역에 걸쳐 일본을 연구해 왔다. 학술지 ‘비판적 아시아 연구’의 일본 편집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일본 도쿄대 고등연구소(UTIAS) 겸임 연구원이다.



‘로보 사피엔스 재패니쿠스’는 ‘원주민과 이주민: 일본 도시의 형성과 재형성’, ‘다카라즈카: 현대 일본의 성(性)정치와 대중문화’에 이은 그의 세번째 저작이다. 그의 이력에 비춰 인간형 로봇 ‘휴머노이드’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영어판 원저의 부제가 ‘로봇, 젠더, 가족 그리고 일본 국가’(Robots, Gender, Family and The Japanese Nation)인 것도 마찬가지다. 지은이는 로봇을 “센서, 렌즈, 소프트웨어, 원격 통신기, 동작 장치, 배터리, 합성 소재와 섬유 등의 기술을 이용해, 인간의 감독(원격조종)하에 또는 자율적으로 환경과 상호작용 할 수 있는, 서로 다른 기술들의 집약체”로 정의한다. 오늘날 로봇의 대다수는 제조업 현장에서 쓰이는 산업 로봇이다. 제조업 로봇 밀도는 한국이 단연 1위로, 피고용인 1만명당 932대의 로봇을 보유(2021년 기준)했다. 싱가포르(605대)와 일본(390대)이 2, 3위로 뒤를 잇는다.



일본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의 애니메이션 ‘철완 아톰’의 국내판 디브이디(DVD) 표지.

일본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의 애니메이션 ‘철완 아톰’의 국내판 디브이디(DVD) 표지.


산업 로봇과 별개로 인간형 로봇을 향한 인간의 꿈은 식을 줄 모른다. 대중문화에서 첨단 산업기술까지 인간형 로봇의 상상과 개발의 최선두가 일본이다. 일본 만화의 거장 데즈카 오사무가 ‘철완 아톰’을 선뵌 게 1951년이다. 한국에는 ‘우주소년 아톰’으로 알려졌다. 아톰은 본인보다 나이가 어린 로봇 부모와 로봇 남매까지 어엿한 로봇 가족의 장남이었다. 휴머노이드 로봇은 두가지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몸체가 인간과 닮아서 머리·팔·몸통·다리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인간의 생활환경에서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움직여야 한다. 로봇이 생물학적 성(섹스)을 가졌을 리 없다. 그런데 일본의 휴머노이드 로봇이 특이한 것은 대부분 성별이 드러나 있다는 것. 겉모습은 물론이고 부여된 기본 임무도 인간의 전통적 가부장제에서의 성 역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로봇조차 ‘젠더’ 규범에 종속돼 있다는 뜻이다. 남성 로봇은 ‘안드로이드’, 여성 로봇은 ‘자이노이드’라고 부른다. 이에 대해 지은이는 휴머노이드가 ‘문화적 성기’를 가졌다고 말한다.



오늘날 로봇 선진국인 일본의 대중 정서에는 로봇이 외국인 노동자보다 낫다는 인식도 있다. 특히 돌봄 노동의 경우, 이주 노동자와 달리 로봇은 문화적 차이가 없고 동아시아 나라들과의 역사적 갈등 문제도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몇몇 여론조사에서 노인들은 외국인보다 로봇 돌보미를 더 편하게 생각했다.



2009년 7월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패션쇼에 휴머노이드 로봇 HRP-4C가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공개되고 있다. EPA 연합뉴스

2009년 7월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패션쇼에 휴머노이드 로봇 HRP-4C가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공개되고 있다. EPA 연합뉴스


2009년 일본 국립산업기술총합연구소는 일명 ‘밈’으로 불린 자이노이드 ‘HRP-4C’를 선보였다. 160㎝가 조금 안 되는 키에 몸무게 45㎏의 이 ‘여성 로봇’은 당시 20대 일본 여성들의 평균치에 가까웠다. 밈은 그해 오사카의 한 패션쇼에서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공개돼 눈길을 끌었다. 지은이는 밈을 일본 최초의 전국 미인대회인 1931년 ‘미스 일본’의 2009년 버전으로 봤다. 밈의 외형은 “불두덩과 풍만한 가슴, 맵시 있고 자연스런 엉덩이가 강조됐는데, 로봇 신체에 왜 이런 해부학적 특질이 필요했는지”에 대해 지은이는 일본 로봇공학자들에게서 답을 얻지 못했다.



지은이는 “로봇과 인공지능 설계자들이 단순히 우리 세계를 반영하는 제품을 만드는 게 아니라, 성별의 특정 규범을 강화하고 정당성을 부여”한다고 갈파했다. 그러나 지은이가 보기에 더 심각한 문제는 일본의 휴머노이드가 젠더 규범을 넘어 가부장제 국가주의와 제국주의의 향수를 짙게 드리운다는 것.



일본 최장수 총리로 일본 사회의 극우화를 이끌었던 아베 신조는 2006년 임기 첫해에 ‘이노베이션 25 전략위원회’를 만들었다. “아름답고 혁신적이고 로봇화된 일본 사회로 나아갈 청사진”을 그리는 임무를 맡았다. 다카이치 사나에가 담당 장관으로 임명됐다. 맞다. 불과 두달 전인 지난 10월 일본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된 극우 성향 정치인, 그 사나에다. 위원회는 ‘이노베 가족의 하루’라는 만화로도 비전을 홍보했다. 로봇 가족인 이노베 가족은 부부, 딸과 아들, 남편의 부모로 구성된 확대가족의 전형이다. 이 가족의 일원이자 돌봄 로봇 ‘이노베 군’은 가부장적 확대가족 안에서 위계적 성 역할을 유지할 수 있도록 여성의 돌봄노동을 보조한다.



2017년 6월 도쿄 인근 지바현의 고찰 고후쿠지(光福寺)에서 일본 소니가 만든 애완견 로봇 ‘아이보’ 중 수명이 다 한 제품들의 장례의식이 열리고 있다. 이 사찰에선 2015년부터 거의 매년 로봇 장례식을 열고 있는데, 주례 스님은 “로봇들의 영혼이 몸에서 떠나가게 하는 의식”이라며 최첨단 기술에 대한 장례식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올리는 부조화가 흥미롭다고 말했다. 유투브 갈무리

2017년 6월 도쿄 인근 지바현의 고찰 고후쿠지(光福寺)에서 일본 소니가 만든 애완견 로봇 ‘아이보’ 중 수명이 다 한 제품들의 장례의식이 열리고 있다. 이 사찰에선 2015년부터 거의 매년 로봇 장례식을 열고 있는데, 주례 스님은 “로봇들의 영혼이 몸에서 떠나가게 하는 의식”이라며 최첨단 기술에 대한 장례식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올리는 부조화가 흥미롭다고 말했다. 유투브 갈무리


로버트슨의 미시간대 제자인 조수미 명지대 교수는 “아베 정권이 구상한 ‘이노베이션 25’는 실은 메이지 유신과 일본의 제국주의, 전시 프로파간다에 등장하던 민족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일본적 가치’를 최신 로봇 기술로 구현한 복고적 유토피아 세계에 가깝다”(책의 해제)고 짚었다. 미래지향적이고 가치중립적으로 보이는 로봇 기술이 낡은 보수 이념의 상상력 안에서 구현되는 현실은 초현실적이다. 그 진짜 문제는 “현존하는 사회 문제와 갈등 해결을 사회적인 노력 대신 기술에 대한 상상공학적 낙관으로 덮어버린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과 로봇공학을, 나아가 기술 일반을 어떻게 하면 더 진보적 방향과 발전적 상품 출시로 이끌 수 있을까? 지은이는 과학·기술·공학·예술· 수학의 영어 단어 첫 글자를 따서 ‘스팀(STEAM)’으로 불리는 통합교육을 강조한다. 성차별주의와 성별 고정관념에 문제를 제기하고 진정 진보적인 기술을 이용해 문명화되고 인본주의적인 적용을 ‘상상공학’ 해낼 지적 도구를 제공하는 것은 예술과 인문학”(한국어판 서문)이기 때문이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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