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대 '핑크 타이드 2.0' 퇴색 기조
아르헨·파나마·볼리비아 등 보수 집권
'서반구 우위 회복' 트럼프에겐 유리
"우파 성과 없으면 다시 좌파 득세"
내년 콜롬비아·브라질 대선이 시험대
이달 14일(현지시간) 칠레 대선 결선 투표에서 강경 우파 성향의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 공화당 후보가 승리했습니다. 칠레의 이번 대선은 중남미에서 '블루 타이드(우파 정부 연쇄 집권)' 흐름이 뚜렷해질지, '핑크 타이드(좌파 정부 연쇄 집권)'가 여전할지를 판단하는 가늠자로 평가받았습니다. 이곳에서도 우파 후보가 당선되면서 '핑크 타이드 2.0'의 퇴색 기조는 더 선명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남미에서는 1999년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정권이 출범한 후 2000년대 중반까지 '핑크 타이드 1.0' 바람이 불었습니다.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온건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죠. 하지만 원자재 가격 폭락과 부패 스캔들 등으로 브라질, 칠레, 아르헨티나 등에선 우파 정권에 자리를 내줬습니다.
2020년대 들어 다시 '핑크 타이드 2.0' 시대가 열렸습니다. 2018년 멕시코를 시작으로 아르헨티나·과테말라·파나마(2019년), 볼리비아(2020년), 페루·칠레(2021년), 콜롬비아·브라질(2022년)에 줄줄이 좌파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중남미 주요 6개국(브라질, 멕시코,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칠레, 페루)을 좌파가 휩쓸게 된 건 사상 처음이었습니다.
아르헨·파나마·볼리비아 등 보수 집권
'서반구 우위 회복' 트럼프에겐 유리
"우파 성과 없으면 다시 좌파 득세"
내년 콜롬비아·브라질 대선이 시험대
편집자주
매일 보도되는 국제 뉴스를 읽다 보면 사건의 배경이나 해당 국가의 역사 등을 알지 못해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종종 생깁니다. 5월 9일부터 격주 금요일에 만날 수 있는 '세계는 왜'는 그런 궁금증을 쉬운 언어로 명쾌하게 풀어주는 소화제 같은 연재물입니다.칠레 대통령 당선인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왼쪽)와 배우자 마리아 피아 아드리아솔라가 14일 산티아고에서 열린 대통령 선거 결선 투표에서 승리한 후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산티아고=EPA 연합뉴스 |
이달 14일(현지시간) 칠레 대선 결선 투표에서 강경 우파 성향의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 공화당 후보가 승리했습니다. 칠레의 이번 대선은 중남미에서 '블루 타이드(우파 정부 연쇄 집권)' 흐름이 뚜렷해질지, '핑크 타이드(좌파 정부 연쇄 집권)'가 여전할지를 판단하는 가늠자로 평가받았습니다. 이곳에서도 우파 후보가 당선되면서 '핑크 타이드 2.0'의 퇴색 기조는 더 선명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남미에서는 1999년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정권이 출범한 후 2000년대 중반까지 '핑크 타이드 1.0' 바람이 불었습니다.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온건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죠. 하지만 원자재 가격 폭락과 부패 스캔들 등으로 브라질, 칠레, 아르헨티나 등에선 우파 정권에 자리를 내줬습니다.
2020년대 들어 다시 '핑크 타이드 2.0' 시대가 열렸습니다. 2018년 멕시코를 시작으로 아르헨티나·과테말라·파나마(2019년), 볼리비아(2020년), 페루·칠레(2021년), 콜롬비아·브라질(2022년)에 줄줄이 좌파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중남미 주요 6개국(브라질, 멕시코,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칠레, 페루)을 좌파가 휩쓸게 된 건 사상 처음이었습니다.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의 대통령궁 앞에서 2019년 5월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재선 1주년 기념 친정부 집회가 열린 가운데 친정부 지지자들이 고(故) 우고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 벽화 앞에 모여 있다. 카라카스=로이터 연합뉴스 |
그러나 현재는 '핑크 타이드 2.0'이 재차 위기를 맞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2023년 아르헨티나의 극우 성향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 당선 이후 에콰도르(2023년), 파나마(2024년), 볼리비아·칠레(2025년)에서 잇따라 범보수 성향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엘살바도르, 파라과이, 코스타리카 등 기존 우파 또는 중도우파 성향 국가들은 물론, 현재 미국 개입 논란이 일고 있는 온두라스 대선에서도 우파 후보 당선이 확실시되는 상황입니다. 왜 중남미 국가들은 또다시 '핑크' 대신 '블루'를 택하기 시작한 걸까요?
세계는 왜 |
좌파 정부 무능, 경기 침체로 실망
콜롬비아 영화 감독인 카밀로 레스트레포가 지난달 6일 수도 보고타에서 열린 사진작가인 에드가 히메네스의 사진들을 고르고 있다. 히메네스는 콜롬비아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개인 사진작가로 유명하다. 보고타=AP 연합뉴스 |
우선 지난 10여 년간 좌파 정부의 무능과 경기 침체로 국민들의 실망감이 누적됐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2005년부터 사회주의 정부가 집권한 볼리비아는 무리한 국책 사업, 관료 부패, 과도한 재정 지출 등으로 2010년대 들어 경제위기에 빠졌는데요. 식량난과 물가 폭등에 분노한 유권자들은 결국 지난 10월 20년 만에 좌파 정권을 무너뜨렸습니다.
세계 최대 코카인 생산국인 콜롬비아는 마약 정책 실패로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친(親)미 국가였던 콜롬비아에서 역사상 첫 좌파 대통령에 오른 구스타보 페트로 대통령은 취임 후 반군 및 마약 밀매 집단과 평화 협정 체결을 추진했습니다. 유혈 사태 중단을 위해 소탕 작전 대신 대화를 택한 것이죠. 하지만 큰 성과를 내지 못하는 사이 극우 성향의 무장 조직이 세력을 키우면서 마약 테러 범죄 확산 등으로 국정 운영이 불안해졌습니다.
페루에서는 급진 좌파 성향의 페드로 카스티요 전 대통령이 측근 부패 연루 의혹 등으로 2022년 탄핵을 당했습니다. 부통령으로 직을 승계한 디나 볼루아르테 대통령도 뇌물 수수 의혹 및 반(反)정부 시위대 강경 진압 지시 의혹 등으로 지난 10월 탄핵됐습니다.
'마두로 정부'가 불러온 우파 정책
베네수엘라의 경우 중남미에 핑크 타이드 바람을 불고온 우고 차베스 대통령의 그늘 아래 당선된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13년째 장기 집권 중인데요. 마두로 정부 시절 국영 석유기업 부실 운영 등 정책 실패로 살인적 인플레이션이 이어지면서 경제 상황이 초토화됐고, 이로 인해 베네수엘라인들이 인접국으로 대거 탈출하면서 역설적으로 주변국들에서는 반이민 등 우파 정책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나라가 칠레입니다. 이번에 당선된 우파 성향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 대통령 당선인은 △불법 이민자 추방 △국경 장벽 건설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죠. 칠레 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칠레 거주 외국인은 200만 명에 달하는데, 이는 2018년 대비 46% 증가한 수치입니다. 이 중 불법 이민자는 33만6,000명에 달하고, 대다수가 베네수엘라 출신입니다. 2022년 기준 살인 사건은 1,322건으로, 2018년보다 43% 늘어났습니다.
또 '이민 반대'를 내세운 카스트 대통령 당선인의 승리가 확실시되면서 칠레에 체류 중이던 난민들이 대거 페루로 월경하자, 호세 헤리 페루 대통령은 지난 10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이민, 범죄 증가로 '외국인 혐오 현상'"
베네수엘라 군부인 볼리바르 민병대원이 10월 6일 수도 카라카스에 위치한 유엔 본부 건물 밖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경제·군사 개입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카라카스=AFP 연합뉴스 |
불법 이민자와 강력 범죄가 증가하다 보니 역내에선 안보가 최대 이슈로 부상했습니다. 윌 프리먼 미국외교협회 중남미 연구원은 미 뉴욕타임스(NYT)에 "조직 범죄는 엄청난 변혁적인 힘을 갖고 있으며, 현재 이 지역은 그로 인한 파급 효과를 해결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칠레의 공화당 하원의원인 렌조 트리소티도 "이민과 범죄 증가가 역사적으로 다양한 인종이 어우러진 (칠레의) 국제 도시 이키케에 '매우 위험한 외국인 혐오 현상'을 초래했다"고 꼬집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난해 2월 당선된 우파 성향 나이브 부켈레 엘살바도르 대통령은 시민권 제한, 갱단 소탕 등의 정책으로 하나의 본보기로 자리매김했고요. 좌파 및 중도좌파로 분류되는 로드리고 차베스 코스타리카 대통령, 야만두 오르시 우루과이 대통령은 부켈레 대통령의 강경책을 따라하려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지난 2월 부켈레 대통령에 대해 "폭력으로 악명 높던 나라를 서반구에서 가장 안전한 국가 중 하나로 탈바꿈시켰다"고 칭찬하기도 했죠. 오르시 대통령은 지난달 엘살바도르의 정책을 두고 "분석해 볼 만한 사례"라고 언급했다가 발언을 급히 정정하기도 했습니다.
'돈로 독트린' 트럼프에겐 호재?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지지자가 10월 30일 수도 카라카스에서 열린 '미군의 카리브해 군사 활동 반대' 집회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있다. 카라카스=AFP 연합뉴스 |
중남미의 우경화에는 올해 들어 시작된 트럼프 행정부의 재집권도 한몫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 공격, 미 국제개발처(USAID) 원조 중단, 국경 봉쇄 등으로 중남미에 대한 압박을 강화해 왔는데요. 이에 트럼프 대통령의 범죄 강력 대응, 민족주의 강조 등의 전략을 본뜬 중남미의 우파 정치인들이 유권자들의 불만을 발판 삼아 부상하고 있다고 미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분석했습니다.
중남미에서 우파가 자리 잡는 사이 트럼프 대통령은 조용히 미소 짓고 있다는 해석도 나옵니다. 미국 외교안보 전문 싱크탱크 스팀슨센터의 벤자민 게단은 "현재로서 중남미 정치적 흐름은 미국에 유리하다"며 "미국이 중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해 줄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실제로 백악관이 지난 5일 홈페이지에 공개한 2025년 국가안보전략(NSS) 보고서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비(非)서반구 경쟁국들은 현재 우리에게 경제적 불이익을 주고 미래에는 전략적으로 해를 끼칠 수 있는 방식으로 서반구에 크게 진출해 왔다"며 "번영을 위한 전제 조건으로 (우리는) 서반구에서 우월한 지위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취임 이후 일대일로(육상·해상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통해 중남미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꾀하는 중국을 겨냥한 셈인데요. 이른바 '돈로(Donroe·도널드 트럼프와 제임스 먼로의 합성어) 독트린'을 통해 서반구에서의 우위를 회복하겠다는 얘기입니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22일 베네수엘라 원유 봉쇄 등의 목적이 '좌파' 마두로 정부 압박이라고 밝혔는데요. 중국과 러시아가 베네수엘라를 지지, 사실상 중남미가 미중 패권 경쟁의 대리전 무대인 것으로 풀이됩니다.
"유권자 반발 일시적 현상일 수도"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이 19일 상파울루에서 열린 재활용 쓰레기 수거 노동자 가족들과 함께한 크리스마스 행사에서 받은 선물을 들어올리고 있다. 상파울루=AP 뉴시스 |
다만 중남미의 우경화는 유권자들의 반발이 일시적으로 나타난 현상일 수도 있다는 지적도 제기됩니다. 미국 싱크탱크인 미주대화기구의 마이클 시프터 전 회장은 "'트럼프주의는 특정 상황에서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새 정부는 국정 운영 등 여러 분야에서 성과를 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좌파가 다시 득세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결국 중남미 최대 민주주의 국가인 콜롬비아와 브라질의 내년 대선이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페트로 대통령과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 모두 '반트럼프 메시지'를 적극 활용, 안정적으로 지지율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손성원 기자 sohnsw@hankook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