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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의 창]음반 흉년의 시대, 명반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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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의 창]음반 흉년의 시대, 명반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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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개봉했던 김대승 감독의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는 시대를 앞서간 작품이었다. 주연배우들의 섬세한 감정 연기, 비 오는 날 인우(이병헌)의 우산 속으로 파고든 태희(이은주), 쇼스타코비치를 배경음악 삼은 바닷가 왈츠 장면 등은 요즘 영화와 비교해도 촌스럽지 않다. 영화 속 동성애 코드도 당시로선 파격적이었다.

“인생의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대도 그 아래는 끝이 아닐 거라고 당신이 말했었습니다. 다시 만나 사랑하겠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마지막 대사는 이 영화만큼이나 생명력이 길다.

그런데, 기자에게는 <번지점프를 하다>가 영화보다 주제곡으로 먼저 각인됐다. 예고편의 배경음악으로 깔린 ‘오 그대는 아름다운 여인’을 듣고, 이 영화는 꼭 극장에서 보리라 다짐했다. ‘퀸’의 프레디 머큐리 못지않은 가성으로 노래를 부른 이광조의 오리지널 버전을 좋아했는데, 영화 주제곡을 부른 김연우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른 감흥을 줬다. 이 곡을 골라낼 정도의 선구안을 가진 감독 혹은 제작자가 만든 영화라면 일정 수준 이상일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가수 본인도 애착이 컸는지, 이광조는 최근 발매된 새 앨범 <글로리 데이즈>(Glory Days)를 포함해 자신의 앨범에 몇차례 이 곡을 싣지만 첫 녹음의 소름 돋는 고음을 내지는 못한다.

이광조는 몇년 전 전주KBS의 <백투더뮤직>에 출연해 “지금은 그렇게 부르라면 못 부른다. 그때는 막 높은 데다가 묘했거든. 지금 이거를 이런 식으로 부르면 얼마나 좋을까. 때려죽여도 안 된다”고 했다.

서론이 길었던 건 이 아름다운 노래가 머리곡으로 실렸던 음반 <우리 노래 전시회>(1985)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다. 그룹 ‘들국화’의 최성원이 프로듀싱을 한 이 옴니버스 앨범에는 ‘오 그대는 아름다운 여인’ 외에도 시대를 초월한 노래들이 빼곡하게 실렸다.

들국화로 데뷔하기 이전 전인권의 폭발적인 가창력을 엿볼 수 있는 ‘그것만이 내 세상’, 최성원의 ‘제발’, 시인과 촌장의 ‘비둘기에게’, 어떤날의 ‘너무 아쉬워 하지 마’, 강인원의 ‘매일 그대와’ 등. 작사가로 더 유명한 박주연이 직접 부른 ‘그댄 왠지 달라요’에서는 기교 없이 담백하고 고운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1집만큼은 아니지만 2~4집에도 좋은 노래가 많이 담겼다. 1987년 발매된 2집에는 들국화의 ‘너의 작은 두 손엔’, 어떤날의 ‘그런 날에는’ 등이 실렸고, 3집(1988)에는 박학기의 ‘계절은 이렇게 내리네’, 푸른하늘의 ‘그대 다시 오면’, 4집(1991)에는 동물원 김창기의 ‘너의 자유로움으로 가’ 등이 담겼다.

“노래라는 게 그렇다. 그 불가사의한 매력의 핵심을 쉽게 몇마디의 언어로 포착해내기는 어려운 일이다. … 이 곡이어야만, 이 글이어야만, 무엇보다도 이 목소리여야만 가능한 어떤 기적 같은 음악의 순간이 있다.” 24일 세상을 떠난 음악평론가 김영대씨의 책 <더 송라이터스>에 있는 말이다. 이 음반을 들었을 때 기자도 이런 순간을 경험했던 것 같다.

명반의 조건 중 하나는 생명력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리즈에 실린 몇몇 노래들은 누군가의 플레이리스트에 지금도 올라 있고, 몇몇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됐다. 대다수 히트곡들이 반짝하고 잊히는 세상에서, 세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노래를 만들고 불렀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실제 당시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했던 음반 참여 가수들은 한국 대중음악사의 중요한 뮤지션들로 성장했다. 1집은 경향신문과 가슴네트워크가 2007년 공동 선정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72위에 올랐는데, 당연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이 음반들은 중고시장에서도 고가로 거래되는데, 음반 컬렉터들에게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기자 역시 1집 LP와 1~3집을 묶은 CD 박스반을 어렵게 구했다.


<우리 노래 전시회>의 리부트 앨범이 40년 만에 나온다. 다음달 5일 LP로 발매되는 앨범에는 한국대중음악상을 받은 포크 듀오 여유와 설빈의 ‘생각은 자유’, 오연준의 ‘서귀포 돌고래’ 등 11곡이 담겼다고 한다. 제작사가 공개한 앨범 재킷 이미지가 1집을 연상케 해 더 좋았다. 1~4집에 이어 리부트 앨범을 프로듀싱한 최성원은 언론 인터뷰에서 “이런 기회가 아니면 묻혀가는 좋은 노래와 훌륭한 뮤지션이 너무 많다. 보석 같은 친구들을 발굴해 소개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톱 가수들도 정규앨범을 좀처럼 내지 않는 음반 흉년의 시대에 귀한 시리즈의 귀환이 반갑다.

이용욱 문화에디터 겸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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