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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황 칼럼] 천박해지는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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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황 칼럼] 천박해지는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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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의 과시와 졸속 입법, 헌법 궤도 이탈
본질 가치는 멀어지고 민주주의 외양만
민주당, 자기 모순 성찰하고 책임의식을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24일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허위조작정보근절법(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국민의힘 불참 속에 처리한 뒤 본회의장을 나서고 있다. 민경석 기자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24일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허위조작정보근절법(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국민의힘 불참 속에 처리한 뒤 본회의장을 나서고 있다. 민경석 기자


우리 신문 사설과 칼럼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정치를 두고 ‘누울 자리 보고 발 뻗어라’는 소리를 여러 번 했다. 그 결과를 고려하고 행동하라는 의미로 입법 폭주에 집권당의 책임의식을 주문한 것이다. 만년 야당만 하다가 정권을 잡은 게 아니기에 더 그렇다. 민주화 이후 보수정당과 수차례 정권을 주고받아 상당 기간 집권 경험을 한 터라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신중할 일에 대해 가늠할 수준에 이르지 않았느냐는 뜻이다. 민주주의에 어울리는 정치력을 담보하지 못한 윤석열 정부 스타일과 일거에 힘으로 갈아엎으려 했던 비상계엄 사태 또한 반면교사가 되고도 남을 일이다.

하지만 민주당의 정치행위는 오늘만 있는 것처럼 조악하다. 국정을 책임진 정당으로서 갖춰야 할 진중함과 분별을 찾아보기 어렵다. 걸핏하면 다수의 힘에 의존한다. 이석연 국민통합위원장의 고언처럼 '헌법적 궤도'를 이탈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는 이를 두고 폭력이라 했다. 상임위와 법사위를 통과한 법안도 본회의에서 뒤바뀌는 일이 다반사다.

특위 등 위원회 종료 뒤 위증행위 고발 주체를 국회의장으로 하는 국회증언감정법 개정안이 법사위를 통과한 후 본회의 상정 땐 돌연 법사위원장으로 변했다가 우원식 의장의 제동으로 국회의장으로 되돌려진 황당 사건이 벌어진 게 석 달 전 일이다. 법사위 강경파 의원들의 맹목적 과욕에 지도부가 방조한 탓이다.

그러니 본회의에 상정하고도 고치고, 또 고친 내란재판부와 허위조작정보근절 법안 파문은 단순히 일회성 졸속이 아니다. 책임정당으로서, 더욱이 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입법기관으로서 소양을 논할 가치조차 느끼기 어렵다. 이미 한두 번이 아닌 터라 "몹시 나쁜 전례"라며 법의 안정성과 예측가능성을 언급한 우 의장의 우려도 공허하기는 마찬가지다.

더욱이 헌법적 근거를 찾아보기 어려운 내란재판부 법안은 그야말로 뱀꼬리라도 그려보겠다는 오기의 소산이다. 이재명 대통령에 대해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한 조희대 대법원장에 대한 집요한 공격과 괴롭힘 중 하나로 보이는 실익 없는 아집이다. 그게 헌법 원칙을 흔든 중대사안이라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던 탄핵소추로 헌법적 판단을 구하는 게 집권당의 책임 있는 자세다.

허위조작정보의 모호성과 언론에 대한 권력의 제소 남용 소지를 둔 허위조작정보근절법을 보면 이 당의 염치는 어디 있는지 모를 일이다. 전 정권의 언론통제를 두고 '입틀막' 선전전을 펼쳐온 전력에 비춰본다면 말이다. 이제 정권을 잡았으니 언론 비판을 최대한 잠재워 보겠다는 심산일 터다. 민주주의 요체가 표현의 자유이며, 민주적 정통성을 정체성으로 삼아온 당의 역사로 보건대 간판을 바꾼다면 모르겠으나 언론개혁이라는 이름을 달고 민주당이 할 바는 아니다.


기껏 필리버스터에나 기대면서 견제 방향을 잃은 야당 처지에 민주당 폭주는 앞으로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터다. 이미 맛을 봤으니 두 번이든 세 번을 더하든 뭔 대수이겠는가. 강성 지지층이 밀고, 당 강경파가 끌고 가는 모양새를 보면 여론 눈치를 볼 생각도 없고, 대단한 논리를 세울 일은 더더욱 아닌 듯싶다. 정권 보호와 당리당략에 부합한다면 말이다.

지금 정치 상황을 민주주의의 회복이라 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문명국가의 수치'를 더하는 형국이다. 민주주의라는 겉모양만 갖춘 채 본질적 가치에서 멀어지며 천박해지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오늘의 권세가 내일도 이어지리라 확신하는 건 심각한 착각이다. 그럴 의지로 무리에 무리를 더하는 것이라면 국가도 국민도 불행해지는 지름길이다. 지금이라도 자기모순을 성찰하면서 집권당답게 누울 자리 봐가며 행동해야 할 것이다.

정진황 주필 jhchung@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