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환율에 엇갈리는 표정
24일 오전 서울 송파구의 한 백화점 정문 앞에 개장을 10여 분 앞두고 한국인과 중국인 손님들이 줄줄이 서 있다. 최근 원화 가치가 폭락으로 환율 이점을 등에 업은 중국인들이 들어와 국내 매장 명품을 쓸어가자, 백화점 ‘오픈런’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장련성 기자 |
성탄절을 하루 앞둔 24일 오전 8시 서울 송파구의 한 백화점 정문 앞. 영하에 가까운 날씨에 굳게 닫힌 문 앞에 수십 명이 줄지어 있었다. 이 백화점은 10시 30분에 문을 연다. 맨 앞줄에서 담요를 덮고 바닥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니 “하오 치다이 아(好期待啊·정말 기대된다)!”라며 중국어로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인기 명품 제품을 사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줄지어 기다리고 있는 ‘유커(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이었다. 뒷줄에 서 있던 송파구 주민 이모(42)씨는 “개장 시간에 앞서 도착해도 중국인들이 줄 서 있으면 그날은 명품 구경도 못하는 날”이라고 했다.
명품 매장이 있는 백화점 앞은 요즘 한·중 간 ‘오픈런’ 경쟁이 치열하다. 최근 원화 가치가 폭락하자 환율 이점을 등에 업은 중국 ‘큰손’들이 들어와 국내 매장 명품을 쓸어가기 시작한 탓이다. 원·위안 환율은 지난 6월 189원에서 이달 211원까지 11.6% 치솟았다. 원·위안 환율이 210원을 돌파한 것은 16년 전인 2009년이 마지막이었다. 한국을 찾은 중국인들은 면세 혜택뿐 아니라 환차익으로 추가 할인 효과도 누리게 된 것이다.
게다가 지난 9월 유커 무비자 입국이 허용되면서 한국에서 물건을 구매해 중국에서 되파는 이른바 ‘따이공(代工·보따리상인)’까지 다시 몰려오고 있다. 중국 고객이 몰리자 일부 명품 매장은 이들에게 구매금 일부를 상품권·마일리지 등으로 환급해주는 전용 혜택까지 줄 정도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백화점에서 명품이 담긴 쇼핑 봉투를 다발로 들고 있는 따이공 모습이 흔해졌다”며 “인기 품목은 요즘 국내 고객들에게 ‘그림의 떡’”이라고 말했다. 지난 10월 한국을 찾은 중국인 관광객은 45만2531명으로 전년 대비 21.5% 증가했다.
반면 원화 가치가 가파르게 떨어지면서 사회 곳곳에선 신음 소리가 흘러나온다. 고환율은 값싼 수입 식자재를 써온 영세 자영업자들에게 직격탄이 됐다. 서울 중구 남대문 시장에서 붕어빵 가게를 운영하는 박영희(58)씨는 최근 붕어빵 가격을 개당 1000원에서 2000원으로 올릴지 고민 중이다. 원재료인 밀가루가 모두 미국·호주 수입산이라 가격 부담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박씨는 “5000원 하던 밀가루 한 팩 가격이 두 배 가까이 올랐고, 닭꼬치에 들어가는 고춧가루도 중국산인데 환율 영향으로 비싸졌다”며 “서민 음식은 가격 잘못 올리면 욕만 먹게 돼 걱정”이라고 했다.
국내 식품업체에서 물건을 구매해 중남미 등 해외에 수출하는 사업을 하는 김모(42)씨도 울상이다. 김씨는 “구매비로 쓰는 사업자금은 원화로 대출받았는데, 결제가 다 달러로 이뤄지면서 손실이 막대하다”고 했다. 그는 작년 기준 컨테이너 5개 보낼 돈으로 올해는 4개밖에 보내지 못했다고 한다. 김씨는 “식품 기업들이 환율이 치솟자 모두 달러 결제로 전환했는데, 그 손실을 오롯이 우리 같은 영세 사업자가 감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거리 출퇴근을 하는 직장인들은 기름값이 걱정이다. 지난 2주간 국제 유가는 하락세였다. 하지만 국내 휘발유 판매가는 여전히 리터(ℓ)당 1700원대에 머물러 있다. 경기 광명시에 사는 직장인 김태우(29)씨는 매일 경기 수원시로 출퇴근하는데, 한 달 기름값만 20만원이다. 최근에는 주말만 되면 조금이라도 주유비가 싼 주유소를 찾아 원정을 다닌다고 한다. 김씨는 “차에 기름을 넣는 건지 금(金)을 넣는 건지 모를 지경”이라며 “단 10원이라도 싼 주유소를 찾아가면 북새통이 따로 없다”고 했다.
자식을 유학 보낸 사람들에게도 빨간불이 켜졌다. 부산 해운대구에 사는 최미옥(52)씨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유학 중인 딸에게 매달 생활비로 500만원을 보냈다. 하지만 최근 높은 원·달러 환율로 인해 딸의 실질 생활비는 오히려 줄었다고 한다. 최씨는 “딸이 유학을 마치고 자리 잡으려면 앞으로 2~3년은 더 보태야 하는데 원화 가치가 이렇게 떨어지니 유학을 계속 시킬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연말연초 겨울 여행을 위해 결제한 항공권을 취소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직장인 김현주(25)씨는 최근 결제한 내년 2월 유럽 여행 항공권을 결국 취소했다. 환율이 크게 올라 기존에 짜둔 여행 경비로 유럽을 가기엔 턱없이 모자란 탓이다. 튀르키예 여행을 앞둔 김모(26)씨도 “환율이 내려가기만을 기다리다 결국 최고점에서 환전하게 됐다”며 “궁핍한 배낭여행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공항 면세점도 달러를 기준으로 결제하다 보니 내국인 손님이 줄어드는 분위기다. 면세점 업계 관계자는 “면세가를 접하고 일부러 찾아오던 손님들도 요즘은 확 줄었다”며 “할인 행사가 없으면 동일 제품이어도 백화점 가격이 더 저렴한 경우도 있다”고 했다.
[김도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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