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위국헌신상] 박연수 해군 중령
5050일. 박연수(42) 중령이 천안함으로 돌아갈 때까지 걸린 시간이다.
2010년 3월 26일 북한 어뢰에 폭침됐을 당시 천안함(초계함·1000t급)에서 작전관으로 근무했던 박 중령(당시 대위)은 지난해 1월 22일 천안함 이름을 승계한 신형 호위함(3100t급)의 함장으로 부임했다. 박 중령의 지휘 아래 천안함은 지난해 12월 ‘바다의 탑건’으로 불리는 해군 포술 최우수 전투함으로 선정됐다. 돌아온 천안함 용사가 천안함의 부활을 이끌어낸 것이다.
박 중령이 천안함으로 돌아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피격 직후 배가 직각으로 완전히 기운 상황에서 함교 당직자 7명이 외부로 빠져나오도록 도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해상에 추락해 목숨을 잃을 뻔했다. 피격 사건 직후 우울증과 대인기피증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군 생활을 그만두는 것도 고민했다고 한다. 전우와 가족의 지지가 없었다면 힘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박 중령은 본지에 “아내가 무한한 신뢰를 보내줬다”며 “가장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 가족이라는 빛의 소중함을 느꼈다”고 했다.
2010년 3월 26일 북한 어뢰에 폭침됐을 당시 천안함(초계함·1000t급)에서 작전관으로 근무했던 박 중령(당시 대위)은 지난해 1월 22일 천안함 이름을 승계한 신형 호위함(3100t급)의 함장으로 부임했다. 박 중령의 지휘 아래 천안함은 지난해 12월 ‘바다의 탑건’으로 불리는 해군 포술 최우수 전투함으로 선정됐다. 돌아온 천안함 용사가 천안함의 부활을 이끌어낸 것이다.
해군박연수 중령이 작년 3월 천안함 46용사 추모식에서 헌화하는 모습. |
박 중령이 천안함으로 돌아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피격 직후 배가 직각으로 완전히 기운 상황에서 함교 당직자 7명이 외부로 빠져나오도록 도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해상에 추락해 목숨을 잃을 뻔했다. 피격 사건 직후 우울증과 대인기피증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군 생활을 그만두는 것도 고민했다고 한다. 전우와 가족의 지지가 없었다면 힘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박 중령은 본지에 “아내가 무한한 신뢰를 보내줬다”며 “가장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 가족이라는 빛의 소중함을 느꼈다”고 했다.
천안함 함장직은 맡고 싶으면서도 부담스러운 자리였다고 했다. 박 중령은 “천안함은 제 군 생활뿐만 아니라 인생 전체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이름이었다. 함장직을 맡는 것에 대한 중압감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라고 했다. 하지만 천안함이 아닌 다른 함정에서 함장 근무를 하게 되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는 마음이 더 컸다고 한다. 그래서 천안함장에 지원했고 선발됐다. 박 중령의 지휘 아래 천안함은 해군 포술 최우수 전투함, 해군작전사 손상통제 최우수함, 전자기전 우수함 등 여러 상을 휩쓸었다.
박 중령은 “부활한 천안함에서 첫 출항을 하던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갑판 위에서 펄럭이는 태극기를 보며, 46용사의 넋이 이 함정에 깃들어 우리와 함께 항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그는 전했다. 박 중령은 “천안함이 과거의 비극적인 사건으로만 기억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대신 “대한민국 바다를 철통같이 수호하는 필승의 전투함으로 기억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박 중령은 지난 6월 천안함장직을 마치고 해군대학에서 근무하고 있다.
[양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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