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하나를 사이에 둔 삶과 죽음
페드로 알모도바르 영화 <룸 넥스트 도어>는 이탈리아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으로, 시그리드 누네즈 소설 <어떻게 지내요>를 원작 삼은 작품입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말기암 환자 친구로부터 “내가 죽을 때, 옆 방에 있어만 달라”는 기이한 요청을 받은 한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 소설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지 못하는 현대 사회에서 ‘안락사’를 전면화한 걸작이지요. 누군가의 마지막 순간을 무력하게 지켜보는 일의 윤리성을 되짚으면서 타인의 고통에 우리는 과연 어디까지 동참하고 또 연루될 수 있는가를, 아울러 동참과 연루의 자격은 과연 무엇인가를 묻는 영화였습니다. 질병으로 인한 극도의 고통을 겪더라도 죽음만큼은 선택이 불허되는 오늘날, 난제인 안락사를 첨예하게 다룬 이 작품은 전 세계 소수 영화팬들의 극렬한 지지를 얻었고, 외신에 따르면 이 영화가 2024년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돼 첫 상영됐을 때 18분의 기립 박수가 터져 나왔을 만큼 평단의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미국 현대문학의 대표 소설가인 시그리드 누네즈의 소설과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는 어떻게 다를까요. 소설 <어떻게 지내요>와 영화 <룸 넥스트 도어>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영화 속 주인공은 작가 잉그리드입니다(소설 속 화자는 익명). 잉그리드는 오랫동안 친밀했지만 지난 몇 년간 연락이 뜸했던 친구 마사가 암에 걸려 맨해튼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잉그리드는 마사의 병실을 찾고, 둘은 반갑게 재회합니다. 뉴욕타임스 종군기자로 일했던 마사는 전장(戰場)의 죽음에 친숙했지만 이제 곧 다가올 자신의 죽음에 대해선 익숙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더 삶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도 없는 상황입니다.마사는 고독한 삶을 살아 왔습니다. 베트남전쟁 참전 이후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로 괴로워하는 남자친구(아이의 친부)가 떠나자 혼자 힘으로 딸을 양육했고, 그러나 어렵게 키운 딸과의 관계도 악화돼 가족에게 의지할 처지도 못 됩니다. 몸 안의 통증, 엄습하는 죽음의 공포가 마사의 내면을 괴롭힙니다.
마사는 결심합니다. 스스로 이 고통을 끝내버리기로요. 마사는 잉그리드에게 요청합니다. “다크웹을 통해 안락사 약을 비밀리에 구했으니 날 도와달라. 곧 삶을 마감할 것이니 날 설득하진 말라. 이 선택은 비가역적이다. 단, 내가 죽음을 선택했을 때 나의 ‘옆방’에만 있어 달라.”잉그리드는 ‘왜 하필 나인가?’ 하는 생각에 요청을 거부하다가 결국 마사의 부탁을 받아들입니다. 둘은 에어비앤비에서 마사가 예약한 한적한 숙소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곳은 마사의 삶의 종착지이기도 했습니다.
일상을 공유하기 시작한 두 사람. 하지만 마사가 과연 어느 순간에 삶을 종결시킬지를 잉그리드는 알 수 없습니다. 마사는 ‘그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삶을 끝내려 합니다. 그저 일상을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바로 지금’이란 판단이 서면 자연스럽게 약을 복용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마사가 아직 살아 있는지를 확인하던 잉그리드가 잠시 외출했을 때 마사는 아름다운 풍경이 한눈에 보이는 소파 위에서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이 작품은 이처럼, 삶이라는 공간과 인접한 죽음에 대해 사유합니다. <룸 넥스트 도어(The Room Next Door)>란 제목은 ‘옆방’이란 뜻이 될 텐데,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죽어가는 자와 살아 있는 자의 경계가 분절되지만, 생사의 거리는 상상보다 가까웠음을 상기시킵니다.
“잘 지내?”라는 말 대신
영화의 경우 ‘간접적인 죽음’에 관한 주제가 강화됐지만 소설은 죽음 대신 ‘타인의 고통’을 더 직접적으로 다룹니다. 우선 소설의 제목부터 다릅니다. 이 작품의 영어 제목은 이고 소설의 핵심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떻게 지내요? 이렇게 물을 수 있는 것이 곧 이웃에 대한 사랑의 진정한 의미라고 썼을 떼 시몬 베유는 자신의 모어인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프랑스어로는 그 위대한 질문이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Quel est ton Tourment)?”(122쪽) 즉, 우리말로는 ‘어떻게 지내요’라는 단순한 안부 인사가, 영어로는 “무엇을 ‘겪고’ 있나요”이고, 작가 시그리드 누네즈는 저 의미를 확장한 프랑스어로 “당신의 고통은 무엇인가”를 선택했습니다. 마사는 죽음을 앞둔 인물로 그에게 극단적인 시련을 주는 건 고통 그 자체입니다. 죽음까지 수용할 만큼 이 고통을 끝내겠다는 것이었지요. 시그리드 누네즈가 선택한 영어 제목은 상대가 ‘겪고’ 있는 고통을 다루는 질문이면서, 그 고통을 세심하게 ‘존중’하는 방식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잘지내?” 혹은 “너 괜찮아?”라고 직접적으로 묻는 대신, 상대와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상대의 안부를 묻는 말이 바로 ‘What Are You Going Through’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함부로 이해한다고 말할 수조차 없는 존재들이지요. 잉그리드가 죽음을 결단한 마사와 생의 마지막 시간을 공유하고 결국 마사의 곁에 머물며 마사를 떠나보는 것처럼, 인간은 불가해한 고통일지라도 그저 그의 곁에 머물러줌으로써 모든 위안을 다하는 존재임을 소설은 이야기합니다.질병의 신화
타인의 고통이란 시선을 유지하면서 영화의 내부로 들어가보면, 소설엔 등장하지 않는 중요한 상징적 장치가 있습니다. 영화에 총 세 번 등장하는, 미국 사상사이자 철학자인 수전 손택의 저서들입니다. 잉그리드가 찾아간 마사의 병실에, 마사가 죽기 위해 찾은 에어비앤비 침실에 수전 손택의 책이 놓여 있습니다. 수전 손택은 소설엔 등장하지 않는 이름인데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왜 수전 손택의 책을 영화 곳곳에 숨겨뒀을까요. 그 이유는 아마도 영화 <룸 넥스트 도어> 속 사유의 저변을 이루는 기원이, 너무나 분명하게도 수전 손택의 책에 기반하기 때문일 겁니다. 영화에 배치된 수전 손택의 책들은, 영화에 자세하지 않더라도, 수전 손택의 명저 <타인의 고통>과 <은유로서의 질병>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두 책은 수전 손택의 사상이 집약된 대표작이며 영화 속 마사의 발언이 수전 손택의 주장과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수전 손택의 명저 <은유로서의 질병>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질병은 하나의 은유가 돼선 안 되며, 질병은 질병일 뿐이다.”
마사가 잉그리드에게 말하는 바도 그러합니다.
“사람들이 이 병을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은 영웅 서사를 만드는 방법밖에 없나 봐. 생존자는 영웅이다. 어린아이라면 슈퍼 영웅이고. 그저 할 일을 하는 의사들까지도 영웅적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하는 거야. 그런데 도대체 왜 암이 한 사람의 패기를 판단하는 일종의 시험이 되어야 하는 거지? (중략) 암을 선물이자 정신적 성숙의 기회, 자기 자신도 몰랐던 자질을 발달시킬 기회로 생각해라. 최고의 자아에 이르는 여정의 한 단계로 생각해라. 진짜라니까. 그런 헛소리를 들으며 죽어가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132~133쪽)
수전 손택에 따르면,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의 질병은 신비로운 이미지로 변질됐습니다.
병은 심리적인 결함이자 운명적인 저주이기에 그에 맞서는 강인함이 환자에게 요구됐다는 설명이었지요. 환자는 질병과 ‘맞서고 싸워서 이겨야’ 하는 존재이고, 이런 은유엔 주로 전쟁에서 사용된 수사가 동원됐습니다.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질병의 패자이고, 싸워서 이기면 승자가 되는 은유의 구조가 인간의 존엄을 더 황폐하게 만들었음을 수전 손택은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심리적 담론 이면에서 우리가 정확하게 바라봐야 하는 진실은, 질병은 그저 질병일 뿐이고 환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낭만화’를 경계하라는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또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선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일은 언제나 윤리적인 문제인데,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이미지로 소비하면서 오히려 고통을 마비시킨다고 말이지요. 타자의 고통은 한 개인이 결코 가닿을 수 없는 극심한 통증인데, 우리는 ‘본다’라는 명분으로 상대의 고통을 둔감하게 ‘시청’하기까지 합니다. 극중 마사가 잉그리드에게 원하는 바는 바로 위 두 권의 책에서 언급된 바와 동일합니다. 질병은 질병일 뿐이며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는 일은 언제나 실패하므로 그저 인간은 타인의 고통 ‘곁’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이지요. 영화 <룸 넥스트 도어>는 타인의 삶에 접근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고, 타인의 고통을 소비해선 안된다는 자명한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주제의식을 형성합니다. 소설 <어떻게 지내요>에서도 그러했듯이 고통은 들여다보는 대상이 아니라 그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고요히 망자의 곁에 머물러주는 것임을 이야기합니다.
[김유태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83호 (2025년 1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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