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 규제 이슈 넘어 ‘동맹 균열’
지난 5일 EU(유럽연합)가 일론 머스크가 소유한 X에 디지털서비스법 위반을 걸어 1억2000만 유로(약 2052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머스크는 ‘EU 해체론’을 거론하며 강력 반발했고, 미 고위관료들도 가세했다. 미국과 EU가 이어온 ‘대서양 동맹’의 균열이 수면 위로 떠오른 한 장면이다./AFP 연합뉴스 |
유럽연합(EU)이 지난 5일 일론 머스크가 소유한 소셜미디어 ‘X(옛 트위터)’에 과징금 1억2000만유로(약 2052억원)를 부과했다. X의 유료 인증 마크인 ‘블루체크’가 이용자를 기만한다는 이유다. 머스크는 EU를 ‘워크(woke·깨어있음을 뜻하는 좌파 비판 용어)‘라고 부르며 “EU는 해체돼야 한다”고 반발했다. 여기에 JD 밴스 부통령,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까지 가세해 유럽을 비판했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규제 갈등을 넘어, 미국과 유럽의 ‘대서양 동맹’의 균열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해석이 나온다. 미국은 EU가 X에 과징금을 때린 그날, 새 국가 안보 전략(NSS)을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유럽에 대한 미국의 불신이 드러난다. NSS는 “유럽은 과도한 기업 규제, 대규모 이민, 낮은 출산율, 초국가 기구(EU) 등으로 쇠락 중이며 ‘문명 소멸(civilizational erasure)‘에 이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유럽에 대한 미국의 바뀐 시선과 불만이, 일론 머스크를 통해 폭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EU는 2년 전 도입한 디지털서비스법(DSA)의 첫 타깃으로 X를 때렸다. 과거 트위터의 ‘블루체크’는 공인이나 검증된 기관임을 나타내는 ‘인증서’로 가수 비욘세나 프란치스코 교황 같은 유명인 등만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22년 트위터를 인수한 머스크는 한 달에 8달러(약 1만2000원)를 받고 ‘블루체크’를 판매했다. EU는 이를 “사용자를 사기와 조작에 노출시키는 기만이며 규칙 위반”이라고 판단했다.
머스크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검열’”이라고 반발했다. 그는 “EU의 ‘워크’ 슈타지 정치위원들은 ‘스트라이샌드 효과’의 진정한 의미를 곧 알게 될 것”이라고 했다. EU 관료를 옛 동독 정보기관 슈타지(Stasi)나 소련 공산당 정치위원에 빗대며, 숨기려 할수록 오히려 더 퍼지는 현상을 언급한 것이다. JD 밴스 부통령도 “미국 기업들을 쓸데없는 문제로 공격하지 말라”고 가세했고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도 “모든 미국 기술 플랫폼과 미국 국민에 대한 외국 정부의 공격”이라고 했다.
머스크는 과징금에 대한 비판을 넘어 ‘EU 해체’를 주장했다. 그는 “주권은 개별 국가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정부가 국민을 더 잘 대표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EU 체제가 비선출 권력임에도 ‘미국을 향한 규제의 집행자’ 노릇을 하고 있다고 보는 미국 정부의 입장과 동일하다. 미 정부는 NSS에서 EU를 ‘불안정한 소수 정부’라고 지칭하며 “숨 막힐 것 같은 규제에 대한 실패한 집착을 버려라” “표현의 자유를 검열하고 반대 세력을 억압한다” “민주주의 기본 원칙을 짓밟는다”고 맹비난했다.
이에 EU도 반발하고 있다. 토마스 레니에 EU 집행위원회 대변인은 “표적 규제가 아니다”라고 했고, 베라 요로바 위원은 “유럽에서 사업을 하려면 EU의 법을 따라라”고 했다. 라도스와프 시코르스키 폴란드 외무장관은 머스크에게 “화성으로 가라. 거기엔 나치 경례 검열이 없다”고 했다. 머스크가 과거 나치 경례로 물의를 일으킨 사례를 거론한 것이다.
영국 더타임스는 “머스크와 트럼프 행정부가 과징금을 계기로 EU와 전면전으로 들어가고 있다”며 “미국·유럽 관계가 더욱 긴장 상태에 놓이고 있다”고 했다. 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세계 자유주의 질서를 지탱하던 ‘대서양 동맹’ 축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NSS에 대한 유럽 반발도 커지고 있다. 칼 빌트 전 스웨덴 총리는 “새 NSS의 표현은 러시아 크렘린궁의 기이한 사고 방식에서 나올 법한 언어”라며 “유럽의 극우 세력보다 더 오른쪽으로 갔다”고 했다. 제라르 아로 전 주미 프랑스 대사는 “극우파 선전물처럼 읽히는 충격적 문서”라며 “트럼프가 ‘유럽의 적’이라는 인식을 재확인시킨다”고 했다.
이번 갈등에는 유럽 내 반(反)트럼프·머스크 정서도 작용하고 있다. 프랑스의 국제 문제 전문지 르그랑콩티넝이 여론조사 전문 기관 클러스터17에 의뢰해 지난달 말 유럽 9국 시민 955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유럽인의 48%가 “트럼프는 유럽의 적”이라고 답변했다. ‘유럽의 친구’라고 응답한 비율은 10%에 불과했다. 지난 3월 같은 조사에서 유럽인의 79%가 “머스크를 신뢰할 수 없다”고, 58%가 “테슬라를 불매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 빅테크가 유럽 주권에 위협이 된다”는 주장에도 62%가 찬성했다.
EU가 소셜미디어를 통한 가짜 뉴스나 혐오 표현 확산을 경계하며 강력한 규제를 실시하는 반면, 미국은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문화적인 요인도 이번 갈등 요소로 꼽힌다. EU는 지난해 머스크에게 “거짓 정보, 혐오, 무질서, 폭력 선동 같은 유해 콘텐츠를 퍼뜨리지 말라”며 공개 경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머스크는 지난 1월 독일의 우익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 전당대회를 엑스에서 생중계(720만명 시청)하며 “afD를 찍으라”고 선거에 개입했다. 이에 유럽 각국에선 “머스크를 규제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온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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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원선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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