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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VIBE] 신종근의 'K-리큐르' 이야기…청포도 와인, 이육사 고향의 유산

연합뉴스 이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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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VIBE] 신종근의 'K-리큐르' 이야기…청포도 와인, 이육사 고향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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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주간으로 게재하며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이육사 시인[연합뉴스 자료 사진]

이육사 시인
[연합뉴스 자료 사진]



이육사(李陸史, 본명 이원록 또는 이원삼)는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저항 시인이자 무장 독립운동가였다. 그의 짧지만 강렬했던 삶은, 암울했던 시대에 민족의 강인한 의지와 광복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시라는 형식으로 끌어올린 사례로 평가된다.

1904년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에서 태어난 그는 조선 성리학의 거두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유학적 교양과 선비정신이 집안의 공기처럼 흐르는 환경에서 성장했다. 20대 초반부터 이미 독립운동에 발을 들인 그는, 평화적·지식인적 저항에 머물지 않고 항일 무장투쟁의 길을 선택했다.

특히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처음 수감됐는데, 이때 부여받은 수감번호 '264'를 자신의 호(號) '육사'(陸史)로 삼았다. 일제의 통제와 낙인을 자신의 이름으로 전유해버린 이 선택에는, 굴복 대신 저항을 택한 한 지식인의 결기가 응축돼있다.

시인으로서의 활동과는 별개로, 그는 실제 독립운동 조직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의열단에 가입해 국내외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했으며, 중국 난징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교해 군사·정치 교육을 받기도 했다.

이육사 생가[연합뉴스 자료 사진]

이육사 생가
[연합뉴스 자료 사진]



39년 남짓한 생애 동안 무려 17차례나 옥고를 치렀다는 기록은, 그의 저항이 문학적 표현에 그치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1943년 귀국 길에 다시 체포된 그는 중국 베이징 주재 일본 영사관 관할 감옥으로 이송됐고, 모진 고문 끝에 1944년 1월 16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유해는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육사의 시에는 그의 삶과 투쟁이 그대로 녹아 있다. 강인한 의지와 긴장된 언어, 남성적 기백이 느껴지는 그의 작품은 흔히 '저항시'로 분류된다. 현실 고발 이상의 독립운동가로서의 강한 의지와 고통스러운 현실을 넘어서려는 초월의식이 공존한다.

대표작 몇 작품을 떠올려 보면 그 특징이 더 분명해진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던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청포도'는 풍요로운 고향의 이미지와 맑고 청정한 빛, 그리고 언젠가 찾아올 '그날'을 기다리는 마음을 서정적으로 그려낸 시다. 표면적으로는 여름 시골 풍경을 노래하는 듯 보이지만, 맑은 청포도와 푸른 강물, 흰옷 입은 손님은 모두 해방과 귀환, 새로운 시대에 대한 상징으로 읽힌다.

'절정'은 혹독한 추위와 고통의 절벽에 선 화자를 통해, 절망의 끝에서 오히려 '강철로 된 무지개'를 찾겠다는 초인적 의지를 드러낸 작품이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순간에도 꺾이지 않는 정신을 선명한 이미지로 응축했다.

'광야'는 광활한 대지와 시간을 배경으로 민족의 역사를 압축하면서, 고난의 시대를 뚫고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나타나길 염원하는 웅장한 서사시다. 시대적 좌절과 장기적 희망이 동시에 깃들어 있다.

그의 시에는 퇴계 이황의 후손답게 선비적 기개와 지조가 강하게 드러난다. 현실을 직접적으로 고발하기보다는 역사·신화·종교적 상징과 관념적 언어를 빌려, 고난을 견디고 극복하려는 내면의 의지를 표현하는 방식이 두드러진다. 당시 현실은 암울했지만, 시 속에는 다가올 조국 해방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거듭해서 등장한다.

이육사는 생전에 시집을 내지 못했다. 산발적으로 잡지와 신문에 발표된 작품들이 전부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인 1946년, 동생 이원조 등을 중심으로 유고를 정리해 시집 '육사시집'이 간행되면서 그의 문학 세계가 비로소 체계적으로 알려졌다.

이육사 시인 친필 원고[문화재청 제공]

이육사 시인 친필 원고
[문화재청 제공]



이후 그의 시는 교과서에 수록되고, 한국 현대시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좌표가 됐다.

이런 이육사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청포도'는 시간이 지나 그의 생가 주변 마을과 지역 문화에도 새로운 형태로 스며들었다. 시에서 영감을 받아, 그의 문학 정신을 기리고자 고향 안동 도산면 일대에 조성된 와이너리가 바로 '264 청포도 와인'이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질문이 있다. '한국에서 만든 와인은 전통주인가?' 직관적으로는 전통주라고 하면 막걸리, 약주, 청주, 증류식 소주처럼 곡물과 누룩으로 빚은 술을 떠올리지만, 현재 법 제도에서는 조금 더 넓은 범위를 전통주로 인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주 등의 산업진흥에 관한 법률'과 '주세법'에 따르면, 전통주 여부는 술의 종류(탁주·약주·과실주 등)보다 '누가, 어디서, 어떤 재료로 만들었는가'에 의해 정해진다. 법적으로 전통주로 인정받기 위한 주요 기준은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민속주: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지정한 무형문화재 보유자나, 주류 부문의 대한민국 식품명인이 전통 방식으로 빚는 술.

- 지역특산주(일명 농민주): 농어업경영체 또는 생산자 단체가, 제조장이 위치한 시·군·구 및 인접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주원료로 빚는 술.

즉, 한국에서 재배한 포도를 주원료로 하는 와인(과실주)도, 이 기준 가운데 특히 '지역특산주' 요건을 충족하면 법적으로 전통주로 인정된다. 국산 포도 품종을 주원료로 쓰고, 지역 농업인이나 생산자 단체가 직접 빚는 경우, 해당 와인은 법적 의미에서 전통주 지위를 얻게 된다. 전통주로 인정될 경우, 온라인 판매 허용, 주세 감면 등 여러 정책적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관습적·일상적 의미의 전통주는 여전히 쌀·보리 같은 곡물에 누룩을 더해 장기간 이어온 양조법으로 만든 술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제도적·산업 정책 차원에서는, 농업인의 소득을 늘리고 지역 특산물을 적극 활용하기 위해 포도·복분자·사과 등 과실을 원료로 한 술도 전통주의 범주에 포함하고 있다.

이것이 한국 와인이 전통주 범주 안에서 논의되는 이유다.

264 청포도 와인[제조사 홈페이지 캡처]

264 청포도 와인
[제조사 홈페이지 캡처]



'264 청포도 와인'은 시인의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지역의 마을 주민들이 직접 재배한 청포도를 사용해 빚는다. 특히 국내에서 개발된 청포도 품종 '청수'를 주원료로 삼아 화이트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청수는 우리 기후와 토양에 맞게 육성된 토착 품종으로, 산미가 맑고 향이 은은해 화이트 와인에 적합한 품종으로 알려져 있다. 지역 농민이 재배한 이 포도로 빚는 와인은 자연스럽게 지역특산주 요건과 맞닿는다.

현재 생산 중인 와인 이름은 시인의 주요 작품 제목을 따서 '절정', '광야', '꽃' 등으로 지어졌다. 병 라벨과 브랜드 스토리에는 시구절과 작품 세계가 반영되어 있어, 한 병의 술이 동시에 한 편의 시를 떠올리게 하는 구조다.

이 와인들은 지역 특산품을 넘어, 민족시인의 정신과 문학을 담아낸 지역 문화 콘텐츠로 기능한다. 판매 수익의 일부가 이육사 문학관에 기부돼, 문학관 운영과 문학 사업, 교육 프로그램 등에 쓰인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술 한 병을 통해 지역 주민, 방문객, 문학관, 농업이 서로 연결되는 작은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육사가 생전에 술을 어떻게 마셨는지, 포도에 어떤 감정을 담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청포도'라는 시에서 느껴지는 맑고 단단한 기다림, 언젠가 돌아올 '너'를 위해 온 마음을 준비해 두겠다는 약속은, 오늘날 고향 마을에서 빚어지는 청포도 와인과 겹쳐 읽을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시인이 남긴 언어는 문학관의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으로, 그리고 지역의 전통주·농산물 생산이라는 형태로 이어지며 지금 여기의 사람들 삶 속으로 스며든다.

이처럼 이육사의 삶은 폭압적인 시대에 끝내 굴복하지 않았던 한 인간의 기록이자, 지역 공동체와 후대가 함께 기억해야 할 역사다. 그리고 그의 고향에서, 그의 시를 품은 이름으로 빚어지는 전통주의 한 갈래는, 문학과 농업, 지역 경제와 문화가 서로를 지탱하며 이어지는 한국적 '지역 생태계'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와인을 마시는 행위 그 자체보다, 그 술이 어디에서, 어떤 사람들에 의해, 어떤 이야기를 품고 만들어지는지에 주목할 때, 우리는 비로소 술을 통해 지역과 역사를 함께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신종근 전통주 칼럼니스트

▲ 전시기획자 ▲ 저서 '우리술! 어디까지 마셔봤니?' ▲ '미술과 술' 칼럼니스트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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