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한겨레 언론사 이미지

사과 없는 내란 1주년의 비극 [세상읽기]

한겨레
원문보기

사과 없는 내란 1주년의 비극 [세상읽기]

속보
정청래 "당원 1표제, 재부의 어려워…지선 룰은 수정안 낼 것"
지난 1월25일 오후 ‘윤석열 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주최로 열린 퇴진 촉구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내란 피의자 윤석열 전 대통령을 히틀러처럼 풍자한 천을 두르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지난 1월25일 오후 ‘윤석열 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주최로 열린 퇴진 촉구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내란 피의자 윤석열 전 대통령을 히틀러처럼 풍자한 천을 두르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김종대 | 전 정의당 의원



1945년 3월, 폐허가 된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마지막 유언·정치적 유서를 남겼다. 그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았다. 패전의 원인은 자신에게 있지 않다. 유대인의 음모, 군 수뇌부의 배신 때문이라는 것이다. 침략전쟁이라는 근본적 오류나 전략의 실패와 같은 구조적 패인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미 무너진 체제를 머릿속에서만 유지하려는 인지적 왜곡, 현실 책임을 끝까지 부정하는 망상적 자기 합리화다.



12·3 내란 1년을 맞아 윤석열 피의자가 변호인을 통해 내놓은 880자짜리 입장문을 읽으면, 이 장면이 자연스럽게 겹쳐 보인다. 윤 전 대통령이 내건 제목은 ‘12·3 국민께 드리는 말씀’이다. 형식은 사과문처럼 보이지만, 실제 내용은 철저히 자기 정당화의 변론이다. 12·3 비상계엄은 ‘체제전복 기도’에 맞선 헌법 수호의 결단이었고, 더불어민주당의 탄핵과 예산 삭감, 선거관리위원회의 부정, 민주노총의 간첩 활동, 친중·종북 세력의 준동에 맞선 구국적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입법독재, 사법부 장악, 법치 붕괴가 진행 중이니 “불의한 독재정권에 맞서 똘똘 뭉쳐야 한다”는 호소로 끝을 맺는다. 마지막 문장은 “저를 밟고 일어서 주십시오”라는 표현으로 영웅적 희생의 이미지를 덧칠한다. 자신은 그저 국가와 헌정을 지키려다 희생된 지도자라는 자의식만 남아 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질문 앞에서 이 서사는 금세 허물어진다. 정말 헌정을 수호하려 했다면, 왜 당시 체포 대상 명단에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와 김명수 전 대법원장, 그리고 판사들까지 포함됐는가. 이들은 국회 예산 삭감이나 공직자 탄핵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선관위 투·개표 시스템이 해킹 가능하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이미 여러차례 검증에서 근거 없음이 드러났음에도, 여전히 극우 유튜버들이 퍼뜨려온 음모론의 문장을 거의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국가 지도자의 판단이 유튜버 음모론에 기댔다는 사실만으로도 사태의 심각성은 충분하다. 객관적 자기 인식과 성찰 능력이 붕괴한 자리, 그곳에 망상과 피해의식이 깨진 유리창처럼 널려 있다.



히틀러의 최후가 떠오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베를린이 포위되고, 유의미한 야전군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히틀러는 슈타이너 집단군 같은 사실상의 ‘유령부대’를 언급하며 반격을 지시했다. 물적 토대와 객관적 현실을 지워버린 전쟁 수행, 지도부조차 그것을 비현실적 망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던 순간이다. 이번 윤석열의 입장문 역시, 이미 계엄 기도가 법정에서 규명되고, 국민 다수가 내란의 위험을 목격한 뒤에도 여전히 ‘자기만 옳았다’는 믿음을 굽히지 않는다. 자신은 언젠가 무죄를 받고 부활할 것이라는 기대, 그를 바탕으로 국민의힘과 지지자들에게 ‘최후의 항전’을 부추기는 메시지로 가득 차 있다. 현실은 다른데, 머릿속 서사는 여전히 천동설에 갇혀 있는 셈이다. 세상은 이미 돌아섰는데, 아직도 태양이 자신 주위를 돈다고 믿는 것이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지난달 28일 대구 중구 동성로에서 열린 민생회복 법치수호 국민대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지난달 28일 대구 중구 동성로에서 열린 민생회복 법치수호 국민대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더 딱한 쪽은 국민의힘이다. 내란 1년을 앞두고 장동혁 대표는 “12·3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선 계엄이었다”는 취지로 말하며, 계엄 자체에 대한 분명한 사과를 거부하거나 윤석열의 결정을 사실상 옹호했다. 초·재선 의원들이 뒤늦게 사과의 뜻을 내놓았지만, 당 차원의 명확한 결별 선언이 아닌 개별 의원의 ‘각자도생식’ 사과에 그쳤다. 문제의 핵심은 이 정당이 한때 이 나라를 통치했던 주류 권력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지금껏 보인 태도를 보면, 패망 직후의 독일 보수 엘리트들이 떠오른다. 망상과 독단에 취한 독재자에게 영합하다가 국가를 파멸로 이끌고도, 마지막까지 스스로의 책임을 직시하지 못했던 그들 말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자유한국당 시절 국정농단 사태 책임에 대해서도 이들은 끝내 명확한 자기 고백을 하지 못했다. 그 미해결의 과제가 당명만 바꾼 채 다시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이 정당이, 그리고 그 지지층이 망상에서 벗어나 지혜의 길로 들어서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그것은 단지 ‘잘못했다’는 문장을 한줄 더 쓰는 문제가 아니다. 집단의 깊은 곳에 뿌리내린 인지적 장애, 즉 현실을 불편하다고 해서 지워버리고,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면서도 자신을 ‘희생자’로 느끼는 심리 구조 자체를 직면해야 한다. 이에 대한 치유와 성찰을 건너뛴 지금의 정치 구조는 언제든 또 다른 파국의 씨앗이 될 것이다.



[끝나지 않은 심판] 내란오적, 최악의 빌런 뽑기 ▶

내란 종식 그날까지, 다시 빛의 혁명 ▶스토리 보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