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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랑한 컬렉터... 본고장 유럽서 인정한 안목

조선일보 우정아 포스텍 교수·전시 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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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랑한 컬렉터... 본고장 유럽서 인정한 안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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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먼 컬렉션 깊이 보기… 우정아 교수 특별 기고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인상주의에서 초기 모더니즘까지, 빛을 수집한 사람들' 전시장에서 관람객들이 여성 화가 메리 커샛이 그린 소녀와 여성 그림들을 감상하고 있다. /박성원 기자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인상주의에서 초기 모더니즘까지, 빛을 수집한 사람들' 전시장에서 관람객들이 여성 화가 메리 커샛이 그린 소녀와 여성 그림들을 감상하고 있다. /박성원 기자


1957년 5월 29일, 로버트 리먼 컬렉션 중 르네상스 명화에서부터 19세기 인상주의까지를 망라한 작품 300여 점이 처음으로 뉴욕의 리먼 저택을 떠나 프랑스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에 전시됐다. 개막 직전, 바짝 긴장한 리먼은 슬그머니 자기 손수건을 꺼내 마지막까지 캔버스의 먼지를 털어냈다고 전해진다. 당시 그는 세계적인 금융회사 리먼 브라더스의 수장이었고, 태어나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의 예술적 수준을 파리에서, 그것도 다름 아닌, 루브르 분관인 오랑주리에서, 한때 프랑스의 왕궁이었던 바로 그곳에서, 유럽인들의 눈앞에 꺼내 보이는 건 매우 큰 용기가 필요한 시험이었다. 결과는 폭발적. 한목소리를 낸 적이 없는 프랑스 언론계가 일제히 찬사를 퍼부었고, 잠시 고향으로 돌아온 눈부신 유럽의 걸작을 보기 위해 관객들은 연일 길게 줄을 섰다. 유구한 역사와 귀족의 권위를 천박한 미국 부자들이 돈으로 사려 한다며 은근히 조롱하던 파리 미술계가 ‘뉴욕 은행가 리먼’의 부(富)가 아닌 취향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3일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장에서 관람객들이 스페인 화가 라이문도 데 마드라소 이 가레타의 유화 ‘가면무도회 참가자들’을 휴대폰에 담고 있다. 가장무도회에 참가한 남녀가 햇빛 비치는 온실에서 잠시 둘만의 시간을 즐기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101.6×64.8cm. /김지호 기자

3일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장에서 관람객들이 스페인 화가 라이문도 데 마드라소 이 가레타의 유화 ‘가면무도회 참가자들’을 휴대폰에 담고 있다. 가장무도회에 참가한 남녀가 햇빛 비치는 온실에서 잠시 둘만의 시간을 즐기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101.6×64.8cm. /김지호 기자


리먼 컬렉션은 로버트의 부친 필립 리먼이 1911년 처음으로 렘브란트와 고야의 초상화를 조심스레 구입하면서 시작됐다. 리먼 가문의 앞에는 이미 금융의 J. P. 모건, 철강의 헨리 프릭, 유통의 벤저민 알트먼 같은 거물급 컬렉터들이 있었다. 1870년, 소규모로 개관한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단숨에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과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급으로 성장한 밑바탕에는 1904년 J. P. 모건이 세상을 떠나면서 기증한 7000점의 걸작들이 있었다. 루브르와 프라도는 식민지를 거느리고 세계를 호령했던 프랑스와 에스파냐 제국의 유산을 품은 곳이다. 모건은 의식적으로 이들과 경쟁하기 위해 특히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들을 중심으로 치열하게 작품을 사 모았다. 이는 취향의 문제라기보다는 미국이 영국 식민지에서 시작한 문화적 후발국이라는 콤플렉스를 빠르게 지우고, 왕이 아닌 시민의 국가라는 자부심을 과시하며, 자신의 자본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새로운 권력의 문제였다.

반면 한 세대 다음의 컬렉터로서 로버트 리먼은 이와 같은 국가적 경쟁을 어느 정도 피해 가면서도 발견으로서의 수집과 지식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선택이라는 전혀 다른 전략을 택했다. 필립과 로버트 리먼은 중세의 채식 필사본,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피렌체나 로마가 아닌 시에나의 거장들, 그리고 북유럽 고딕에서 르네상스로 이행하는 과도기를 눈여겨봤다. 즉 이미 위대함이 확인된 교과서적 작품이 아니라 충분히 재평가되지 않은 시기와 지역에 집중함으로써 걸작이라는 것이 하나의 양식과 보편적 취향으로 귀결될 수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장 프레데리크 바지유, ‘이젤 앞에 선 마네’. 줄무늬 종이에 목탄과 흰색 분필, 29.5×21.5cm. /김지호 기자

장 프레데리크 바지유, ‘이젤 앞에 선 마네’. 줄무늬 종이에 목탄과 흰색 분필, 29.5×21.5cm. /김지호 기자


로버트 리먼은 그의 부친 사후, 좀 더 공격적으로 인상주의를 비롯한 근대 회화를 수집했다. 그 이면에는 사람에 대한 그의 애정과 관심이 보인다. 필립이 처음 구입한 게 초상화였던 만큼, 이후로도 리먼 컬렉션에는 17세기 바로크에서 로코코를 거쳐 19세기의 근대 사회로 나아가는 동안 성장해 온 시민들의 초상화가 늘어갔다. 위대하고 기념비적인 대가들의 걸작 가운데, 어린이와 여성과, 모델과 화가들의 소박하고 순수하며 연약한 몸이 드러난 건 그 덕분이다.

앙리 마티스, ‘거울에 비친 모습’. 종이에 목탄, 51.6×40.6cm. /김지호 기자

앙리 마티스, ‘거울에 비친 모습’. 종이에 목탄, 51.6×40.6cm. /김지호 기자


쉬잔 발라동, ‘목욕하기 전’. 황갈색 종이에 목탄과 분필, 보드에 부착. 30.2×29.8cm. /김지호 기자

쉬잔 발라동, ‘목욕하기 전’. 황갈색 종이에 목탄과 분필, 보드에 부착. 30.2×29.8cm. /김지호 기자


로버트 리먼은 특히 완성된 회화뿐 아니라 완성작으로 나아가기 위한 화가의 수많은 실험과 고민의 흔적이 담긴 드로잉 또한 적극적으로 수집했다. 그 덕에 우리는 요절한 화가 바지유가 이젤 앞에 선 마네를 얼마나 애정과 존경을 담아 바라봤는지 엿볼 수 있다. ‘거친 야수 같았던’ 마티스가 강렬한 원색의 대비를 극적으로 뿌려내기 전에 오직 흑백의 목탄만으로 인체의 미묘한 굴곡을 어떻게 치밀하게 포착했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화가들의 모델에서 스스로 화가로 선 쉬잔 발라동이 어떻게 욕망과 거짓이 없는 눈으로 여인의 몸을 그려냈는지 마주할 수 있다. 이들이 지금 처음으로 메트로폴리탄을 떠나 머나먼 한국까지 날아왔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장에서 티끌 하나 없이 말끔한 작품 앞에 선다면, 내 눈에 한없이 아름다웠던 그림들이 혹 다른 이의 눈 밖에 날까 염려하며 손수건을 꺼내 먼지를 털어내던, 그날의 로버트 리먼의 마음이 자연스레 겹쳐질 것이다.

우정아 포스텍 교수·전시 자문

우정아 포스텍 교수·전시 자문


▲전시명: 인상주의에서 초기 모더니즘까지, 빛을 수집한 사람들


▲장소: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기간: 2026년 3월 15일까지

▲주최: 조선일보사·국립중앙박물관·메트로폴리탄박물관


▲문의: (02)2077-9280

▲입장료: 성인 1만9000원

※카카오톡 앱에서 야간 및 신년 관람 할인 판매 중 : 수·토요일 오후 6~9시 야간 관람 15% 할인(12월 6일~27일), 신년(1월 1일~15일) 관람 20% 할인(판매는 12월 15일부터).

[우정아 포스텍 교수·전시 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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