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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에게 월요병은 詩 쓴 후 차올랐던 게 빠져나가며 찾아오는 공허함”

조선일보 황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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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에게 월요병은 詩 쓴 후 차올랐던 게 빠져나가며 찾아오는 공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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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의 예술가’ 낸 황유원 시인
번역이 본업… 앤 카슨 등 국내 소개
‘일요일은 이상한 날/ 가장 거세게 불타오르는 휴일의 정점이자/ 월요병을 앓기 전날// 그런 일요일만 되면 일요일의 예술가는/ 얼마나 많은 호랑이를 일요일에 풀어놓나’(‘선데이 리뷰’)

최근 다섯 번째 시집 ‘일요일의 예술가’(난다)를 펴낸 시인 황유원(43)은 “시 쓰고 예술하는 순간”을 “일요일”이라 칭한다. 일요일의 예술가도 월요병을 앓을까. 그의 월요병은 직장인의 것과 사뭇 다르다. “시를 쓰고 나면 차올랐던 게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엄청난 공허함이 찾아와요. 요즘은 바빠서 월요병 앓을 새가 없네요.”

시인의 일요일은 위태위태한 듯했다. 번역 일이 쏟아져서다. 앤 카슨, 커트 보니것, 코맥 맥카시 등 영어권의 내로라하는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옮겼다. 시인의 본업은 영·한 번역가다. 본업과 부업의 기준은 “돈”, 즉 “생계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황유원에게 시는 “딴 짓”이다.

딴 짓이라 더 가볍다. 그는 “한 사람의 존재, 하루하루 먹고살기는 너무 무겁지만, 우주의 차원에서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했다. 시인은 에어프랑스 웹진에 유령작가로 글 쓰던 시절을 떠올리며 속시원히 날아간다. ‘내가 유령작가였을 때 (…) 유령의 맛을 제대로 볼 수 있었고 유령의 멋을 제대로 낼 수 있었고/ 이렇게 번거로운 육신과 이름에 크게 얽매이지 않은 채/ 비행기만큼이나 커다란 유령이 되어 하늘에 공중문자(skywriting)를 휘갈겨 쓸 수 있었다’ (‘에어프랑스’)

그는 “매 시집마다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다”고 했다. 직전 시집 ‘하얀 사슴 연못’(창비)은 “시인 정지용 등 옛 시인들에 대한 트리뷰트(헌사)”다. “정갈한 겨울 시집이고, 그리스도교 시집 같은 느낌이 강했지만, 이번에는 예술가 콘셉트입니다.” 그럼에도 황유원의 시에 일관되게 흐르는 것은 “가벼울 때는 진짜 가볍고, 진지할 때는 한없이 진지한” 이중인격의 모습. 이 둘이 엉키는 재미가 있다. ‘“이 셰기 제대로 가는 거 맞어?” (…) ㅣ와 ㅖ를 뒤바꿔 발음할 줄 아는 재주/ 그런 놀라운 술재주를 저 영감은 가지고 있고// “벌써 올 시가이 지놨는데 저 셰기 고장난 거 아이야?”’(‘존재와 시간’)

시인 황유원이 인터뷰에 앞서 조선일보미술관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뒤로는 서양화가 곽남신의 작품이 보인다. /남강호 기자.

시인 황유원이 인터뷰에 앞서 조선일보미술관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뒤로는 서양화가 곽남신의 작품이 보인다. /남강호 기자.


대학에서 종교학·철학, 대학원에서 인도철학을 공부했다. 그는 “경전과 문학 사이에서 갈피를 잡느라 힘들었다”고 했다. “경전의 뼈대는 튼튼하지만 너무 살이 없고, 문학의 뼈대는 내가 원하는 것보다 가늘고 살이 너무 많아 비만이에요. 그래서 시라는 형식이 감사하죠.” 며칠 전 고성 옥천사에 다녀왔다는 그는 “한산(寒山)의 쓸쓸함이 몸에 뱄다”고 했다. “찬 바람이 들면 풍선인형처럼 부풀어서 미칠 것 같아요. 미쳐버릴 것 같을 때 무언가를 막 쓰면 시가 돼요.” 시인을 만난 건 월요일이다. 평일에도 대뜸 와버리는 그의 일요일이 부러웠다.

[황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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