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판결에도 “절대 안 된다”최휘영 장관
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종묘에서 허민(오른쪽) 국가유산청장에게 항의하고 있는 세운4구역 재개발 구역 주민(왼쪽). 허 청장이 이날 종묘 인근 세운4구역에 고층 빌딩을 지을 수 있도록 한 서울시 고시에 대해 반대한다는 입장을 발표하자, 세운4구역 주민들은 “정부가 피해를 보상할 것이냐”며 반발했다./장련성 기자 |
서울 종로구의 재개발 구역인 세운4구역에 고층 빌딩을 지을 수 있도록 서울시가 결정한 것과 관련해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허민 국가유산청장이 7일 “모든 수단을 강구해 막겠다”고 했다. 세운4구역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종묘(宗廟)와 170m 이상 떨어져 있는 곳이다. 문체부와 국가유산청은 이곳에 고층 빌딩이 들어서면 “종묘 경관을 해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오세훈 서울시장은 “사업의 취지와 내용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라며 “강한 유감”이라고 반박했다. 세운4구역 재개발 사업을 둘러싸고 정부와 서울시가 정면충돌한 것이다.
최 장관은 이날 오후 1시쯤 종묘 정전 월대에 올라 “관련법을 개정해서라도 종묘 일대에 고층 빌딩이 들어서는 것을 막겠다”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최 장관은 “권한을 조금 가졌다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겠다는 서울시의 발상과 입장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며 “조선 시대 최고 건축물이자 자랑스러운 세계유산에 대한 우리의 마음가짐이 겨우,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느냐”고 했다.
그래픽=이진영 |
서울시는 지난달 30일 세운4구역 높이 제한을 최고 71.9m에서 141.9m로 완화하는 내용의 재정비 계획 결정을 고시했다. 세운4구역은 종묘에서 173~199m 떨어져 있어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문화재 담장으로부터 100m) 바깥에 해당한다. 서울시는 “녹지를 충분히 조성해 종묘가 오히려 더 돋보이게 할 것”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최 장관은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일이냐”며 “법령의 제정, 개정을 포함해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할 것”이라고 했다. 문체부와 국가유산청은 “고층 빌딩이 들어서면 종묘 경관을 해칠 가능성이 크다”는 입장이다. 종묘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가 있는 사당으로, 1995년 12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최 장관은 그러면서 “권력을 가졌다고 마치 자기 안방처럼 마구 드나들며 어좌에 앉고, 차담회 열고, 문화유산이 처참하게 능욕당한 지가 엊그제”라고 했다. 올해 국회 국정감사 과정에서 불거진 김건희 여사의 이른바 ‘종묘 차담회’ 논란을 겨냥한 것이다. 정치권에선 최 장관이 재개발 규제와 상관없는 김 여사 관련 의혹을 언급해 서울시의 결정을 정치적 논쟁거리로 만들려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7일 오후 서울 종묘에서 최휘영(오른쪽)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허민(오른쪽 둘째) 국가유산청장이 서울시의 종묘 앞 개발 관련 대법원 판결에 대한 문체부, 국가유산청 입장 발표 기자회견을 열고 있는 가운데 세운4구역 주민들이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장련성 기자 |
입장문은 최 장관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 장관은 네이버의 전신인 NHN과 인터파크 등 플랫폼 기업의 대표이사를 지낸 IT 전문가다. 지난 7월 장관에 취임했다.
오세훈 시장은 곧바로 현장 브리핑을 하며 맞받았다. 오 시장은 약 3시간 뒤인 이날 오후 4시쯤 세운4구역을 찾아 “세운구역 재개발 사업이 종묘의 가치를 훼손할 수 있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과도한 우려”라고 했다. 그는 “세운지구를 비롯한 종묘 일대는 서울의 중심임에도 오랫동안 방치돼 말 그대로 폐허나 다름없는 상태”라며 “녹지축을 조성해 종묘의 가치를 보존하고 더욱 높이면서 도심 공간 구조를 개편해야 한다”고 했다.
오 시장은 최 장관을 겨냥해 “문화체육을 책임지는 부처의 수장께서 자극적인 용어까지 섞어 무작정 서울시 사업이 종묘를 훼손할 것이라 강변했다”며 “시민단체 성명문 낭독하듯 일방적으로 폄훼하는 모습”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날 세운4구역 주민들은 최 장관과 허 청장을 따라가며 거세게 항의했다. 주민들은 ‘국가유산청은 대법원 판결을 존중하라’ ‘주민 피눈물 누가 닦아주냐’ 등의 손팻말을 들고 “20년 발목 잡은 손해를 다 배상하라”고 했다.
지난 6일 대법원은 문화재 주변의 건설 개발 규제를 완화한 서울시의회의 조례 개정에 대해 “적법하다”고 판결했다. 서울시와 건설 업계는 이 판결로 세운4구역 재개발 사업에 힘이 실릴 것이라고 전망한다. 서울시 관계자는 “일본 도쿄 역사 인근의 마루노우치 빌딩, 뉴욕 그랜드 센트럴 기차역 인근의 원 밴더빌트 빌딩 등 문화유산과 도심 개발이 균형을 이룬 사례가 곳곳에 있다”며 “대법원 판결 취지대로 세운4구역 재개발 사업을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다만 문체부와 국가유산청이 이날 법률 제·개정을 통해서라도 막겠다는 입장을 밝힌 만큼, 재개발 사업이 장기간 표류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최연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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