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조선일보 언론사 이미지

할리우드서 부활한 비운의 명작, 뭐가 달라졌나

조선일보 백수진 기자
원문보기

할리우드서 부활한 비운의 명작, 뭐가 달라졌나

서울맑음 / -0.5 °
‘지구를 지켜라!’ 리메이크作 ‘부고니아’ 내달 5일 개봉
/CJ ENM부유한 바이오 기업 대표 미셸(에마 스톤)은 어느 날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납치당한다. 이들은 미셸이 머리카락으로 안드로메다의 외계인과 교신한다고 믿고 머리를 빡빡 깎아버린다. /CJ ENM

/CJ ENM부유한 바이오 기업 대표 미셸(에마 스톤)은 어느 날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납치당한다. 이들은 미셸이 머리카락으로 안드로메다의 외계인과 교신한다고 믿고 머리를 빡빡 깎아버린다. /CJ ENM


외계인이 곧 지구를 침공할 것이라 믿던 병구(신하균)조차 이 영화가 22년 뒤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운의 명작’이라 불렸던 ‘지구를 지켜라!’(2003)가 할리우드 영화 ‘부고니아’(다음 달 5일 개봉)로 부활했다. 한국에서 만들어져 마니아들 사이에만 알려졌을 뿐, 자칫 묻힐 수도 있었던 기상천외한 외계인 납치극이 화려하게 되살아난 셈이다.

원작의 투자 배급사인 CJ ENM은 2018년부터 영어 리메이크 프로젝트를 추진했고, 원작을 감명 깊게 본 ‘유전’ ‘미드소마’의 감독 아리 애스터가 프로듀서로 합류하며 제작 단계부터 기대를 모았다. 새롭게 탄생한 ‘부고니아’는 제작진과 출연진부터 화려하다. 베네치아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은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그의 페르소나인 배우 에마 스톤과 제시 플레먼스가 주연을 맡았다.

영화 '지구를 지켜라!'의 악덕 회사 사장 강만식(백윤식). /CJ ENM

영화 '지구를 지켜라!'의 악덕 회사 사장 강만식(백윤식). /CJ ENM


‘지구를 지켜라!’(감독 장준환)는 지구 곳곳에 외계인이 숨어 있다고 믿는 병구가 화학 회사 사장 강만식(백윤식)을 외계인이라 확신하고 그를 납치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때수건으로 피부를 벗기고 물파스를 바르는 등 엉뚱한 B급 코미디로 시작하지만, 결말에 이르러선 동족을 해치는 인간의 잔혹함과 이기적인 본성을 풍자하며 반전을 선사한다. 개봉 당시 관객 7만명에 그치며 흥행에 참패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시대를 앞서간 걸작”으로 재평가받았다.

영화 '부고니아' /CJ ENM

영화 '부고니아' /CJ ENM


리메이크작인 ‘부고니아’는 원작의 줄거리를 충실히 따르면서도 시대의 흐름에 맞게 재해석했다. 각종 부패 스캔들에 연루돼 있던 ‘꼰대’ 사장 강만식은 거대 바이오 기업의 여성 CEO 미셸(에마 스톤)로 바뀌었다. 원작의 강만식이 전형적인 권력형 빌런이었다면, 미셸은 좀 더 입체적이고 지능적인 캐릭터로 진화했다. 젊은 나이에 성공해 완벽한 삶을 누리던 미셸은 어느 날 괴한들에게 납치당해 머리를 깎이고, 외계인임을 인정하라는 황당한 협박을 당한다. 삭발한 에마 스톤은 커다란 눈과 주문처럼 읊조리는 낮은 목소리로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며, 관객조차 그 정체를 의심하게 만든다. 원작은 병구의 일인칭 시점으로 진행돼 사회적 약자인 병구에게 조금 더 이입하게 되지만, ‘부고니아’는 양쪽의 시점을 오가며 선악 구도가 더욱 모호해지고 두 인물의 심리전이 더 팽팽해졌다.

영화 '부고니아' /CJ ENM

영화 '부고니아' /CJ ENM


주인공도 오늘날의 세태를 반영하는 인물로 변주됐다. 양봉에 몰두하던 순박한 청년 병구는 배송부 직원 테디(제시 플레먼스)로 바뀌었다. 원작의 병구가 아이처럼 순수한 광기를 보여줬다면, 테디는 음모론에 집착하는 극단주의자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진다. 그는 가족에게 닥친 비극을 감당하지 못하고, 세상의 모든 고통에는 원인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좁은 지하실에 갇혀 잘못된 믿음은 점점 확신으로 굳어진다. 원작의 만화적인 유머와 이른바 ‘병맛’(맥락 없이 들어간 웃음) 감성은 절제됐고, 좀 더 현실적이고 묵직한 풍자로 바뀌었다. 냉소적인 유머는 여전하지만, 영화 전반에는 묵시록처럼 장엄한 분위기가 흐른다.

한국 영화 ‘지구를 지켜라!’(2003)와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된 ‘부고니아’(2025)의 포스터.

한국 영화 ‘지구를 지켜라!’(2003)와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된 ‘부고니아’(2025)의 포스터.


원작과 비교해 조금씩 바뀐 디테일을 찾는 재미도 있다. 병구가 외계인을 퇴치하기 위해 썼던 비밀 병기 물파스는 항히스타민 크림으로 현지화되었다. 병구가 기르던 벌은 더 상징적인 존재가 됐다. 테디는 벌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벌집 군집 붕괴’ 현상이 지구 침공의 전조라고 여긴다. 제목인 ‘부고니아’도 벌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스어인 ‘부고니아’는 죽은 소의 사체에서 벌이 생겨난다고 여긴 고대의 잘못된 믿음을 가리킨다. 죽음과 희생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창조된다는 뜻인데, 영화의 결말에 이르면 제목을 ‘부고니아’로 붙인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백수진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