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1911년 10월 29일 64세
1911년 10월 29일 64세
조지프 퓰리처/ The Authentic History Center |
마감 시간에 쫓기면서 땀을 뻘뻘 흘리며 기사 쓰는데 데스크(기사 출고하는 시니어 기자)가 채근했다. “얼마나 대작을 쓴다고 이렇게 늦나?”
조지프 퓰리처(1847~1911)는 그의 이름을 딴 상으로 더 유명하다. 퓰리처상은 원칙적으로 미국 언론 종사자에게 주는 상이다. 한국 언론사 기자에게는 상을 주지 않는다. 보도 부문 외에도 비보도 부문인 문학·음악에도 상을 주고 있다.
퓰리처상은 1917년 출범했다. 100년 넘는 역사 중 최악의 사건이 있었다. 1981년 퓰리처상 특집 부문 기사가 ‘가짜’로 밝혀졌다. 워싱턴포스트 26세 기자 자넷 쿠크는 여덟 살 흑인 소년이 마약에 빠진 경위를 실감 나게 묘사하며 미국 사회에 경종을 울린 ‘지미의 세계’ 기사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수상 보도가 있던 이튿날 허위 기사로 밝혀졌다.
퓰리처상 가짜 쇼크. 1981년 4월 17일자 3면. |
워싱턴포스트는 자체 조사 결과 해당 기사는 조작이라고 밝혔다. 당초 워싱턴포스트는 자사(自社) 기자의 수상 사실을 1면에 싣고 1개 면에서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그러나 두 통의 전화를 받고 의심을 품었다. 기사에 실린 쿠크 기자의 학력이 허위라고 해당 대학 관계자들이 알려왔다.
쿠크는 오하이오주 바사르대학을 나와 톨레도대학에서 석사를 받았다고 기재했다. 간부 회의를 열어 쿠크 기자에게 확인하는 과정에서 기사도 꾸며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워터게이트’ 특종 보도로 성가를 높였던 워싱턴포스트는 스스로 잘못을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고, 쿠크 기자는 해고됐다.
이 같은 문제도 있었지만 퓰리처상은 여전히 미국 언론계 최고 권위의 상으로 위상을 갖고 있다. 한국계 또는 한국인 기자도 퓰리처상을 받았다. 한국계 미국인 강형원은 1993년 특종 보도 부문과 1999년 특집 사진 부문에서 받았다. 2000년 탐사 보도 부문 최상훈, 2002년 기획 사진·속보 사진 부문 이장욱, 2011년 지역 보도 부문 김주호, 2019년 특종 사진 부문 김경훈이 각각 미국인 동료들과 함께 수상했다. 한국계 작가 우일연은 2024년 논픽션 ‘주인 노예 남편 아내’로 비보도 부문인 전기(傳記)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워싱턴포스트, 퓰리처상 반납 경위 밝혀. 1981년 4월 21일자 4면. |
기자로서도 능력을 발휘했지만 신문사 경영에 더 재능을 나타냈다. 세인트루이스 지역 신문을 인수한 데 이어 뉴욕 지역 신문인 ‘뉴욕 월드’를 인수했다. 제호를 ‘월드’로 바꾸고 “재미없는 신문은 죄악이다”라는 경영 원칙을 세웠다. ‘사실에 입각해 정확하게 쓸 것’ ‘단순한 명사와 쉬운 동사를 사용해 짧고 인상적인 문장으로 쓸 것’ 같은 기사 작성 원칙을 제시했다. ‘월드’는 몇 해 되지 않아 미국 최다 발행 부수 신문으로 성장했다.
‘신문왕’으로 불리는 윌리엄 허스트와 경쟁은 ‘옐로 저널리즘(황색 언론)’이라는 말을 낳았다. 허스트는 1895년 ‘모닝 저널’을 인수해 ‘저널 아메리칸’으로 제호를 바꾸고 신문 시장 장악에 나섰다. 신문 구독료를 낮추고 ‘월드’의 기자들을 스카우트하면서 퓰리처에게 싸움을 걸었다. ‘월드’의 인기 만화 작가를 빼오는 데도 성공했다. 둘의 치열한 싸움 과정에서 만화 주인공인 ‘황색 아이(the Yellow Kid)’를 빗대 ‘황색 언론’이란 말이 등장했다. 두 신문사는 상대보다 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기사로 주목받으려고 미국·스페인 전쟁을 조장하기도 했다.
퓰리처는 40세에 거의 실명에 이르렀다. 이후 뉴욕주 하원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자유의 여신상을 세우는 데 공헌했다. 프랑스가 미 독립 100년을 축하하기 위해 만든 자유의 여신상은 미국으로 운반해 재조립할 비용 마련이 어려워 가져오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퓰리처는 ‘월드’를 통해 모금 활동을 벌였고, 1886년 자유의 여신상을 뉴욕 항구에 세울 수 있었다.
세상을 바꾼 리더 퓰리처. 2014년 8월 14일자 A28면. |
퓰리처는 언론인으로서 현직 대통령과 맞서기도 했다. 1909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월드’ 사주인 퓰리처와 편집 간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월드’는 앞서 루스벨트 정권의 파나마 운하 건설 뇌물 수수와 독직 사건을 잇달아 보도했다. 검찰 기소 후에도 루스벨트를 ‘거짓말쟁이’라고 비판하면서 후속 보도를 이어갔다.
‘월드’는 사설에서 “이 명예훼손 소송의 목적은 대통령이 정부 기관을 이용해 보복을 위한 개인적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게 해 주는 것뿐이다. 대통령이 신문사를, 혹은 신문사 사주를, 혹은 신문사 편집 간부들을 어떤 죄목으로 고발하든 우리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썼다. 시력을 잃은 데다 우울증까지 겪고 있던 퓰리처는 편집 간부에게 “내가 틀리면 나의 의견을 무시하라”고 했다.(2006년 2월 16일 자 A31면)
퓰리처는 1903년 컬럼비아 대학이 신문학과를 개설할 때 저널리스트 교육 기금으로 2만2000달러를 기부했다. 사후 유언에 따라 유산 50만달러를 기금으로 퓰리처상을 제정했다.
[이한수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