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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파도 소리를 그렸더니 고향의 山을 닮았더라

조선일보 허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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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파도 소리를 그렸더니 고향의 山을 닮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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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작가 개인전 19일까지 열려
김민정 작가가 구불구불한 곡선이 겹겹이 쌓인 ‘블루 마운틴’ 앞에 섰다. 그는 “파도 소리를 그렸는데 완성해보니 고향의 산을 닮아 있었다”고 했다. 대표작 ‘산’ 연작이 그렇게 시작됐다. /장경식 기자

김민정 작가가 구불구불한 곡선이 겹겹이 쌓인 ‘블루 마운틴’ 앞에 섰다. 그는 “파도 소리를 그렸는데 완성해보니 고향의 산을 닮아 있었다”고 했다. 대표작 ‘산’ 연작이 그렇게 시작됐다. /장경식 기자


구불구불한 곡선이 겹겹이 쌓여 화면을 가득 채웠다. 끝없이 펼쳐진 산 능선 같기도 하고, 푸른 바다 물결 같기도 하다. 작가는 “바다의 파도 소리를 그려보고 싶었다. 파도가 절벽에 힘 있게 부딪히며 쌓여가는 소리를 겹겹이 쌓이는 먹의 결로 표현했는데, 완성해보니 내 고향 광주의 산을 닮아 있었다”고 했다. 대표작 ‘산’ 연작이 그렇게 시작됐다.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 신관에서 김민정(63) 개인전 ‘One after the Other’가 열리고 있다. 한지와 먹, 불을 사용해 전통 수묵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국제적 명성을 쌓아온 작가다. 지난해 프랑스 매그 재단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선보였던 ‘산’ 연작을 비롯해 30여 년 작품 세계를 망라하는 대표작 20여 점을 펼쳤다.

가로 7.9m에 달하는 대작 '흔적(Traces)'이 지하 전시장에 걸린 모습. /갤러리현대

가로 7.9m에 달하는 대작 '흔적(Traces)'이 지하 전시장에 걸린 모습. /갤러리현대


'흔적(Traces)' 앞에 선 김민정 작가. /장경식 기자

'흔적(Traces)' 앞에 선 김민정 작가. /장경식 기자


지난해 아트바젤 바젤에서 선보여 호평받은 가로 7.9m 대작 ‘흔적(Traces)’도 국내 처음 공개됐다. 구불구불한 먹의 곡선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져 있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된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가장 큰 사이즈의 한지 4장을 이어 붙여 완성한 작품”이라며 “바젤 전시장에선 한참을 작품 앞에 앉아 있는 관객도 있었고, 그림을 보다 눈물 흘리는 사람, 자꾸 돌아와서 다시 보는 관객도 있어서 감회가 깊었다”고 했다.

김민정, 'Predestination'(2024). 한지에 혼합매체, 75×145cm. /갤러리현대

김민정, 'Predestination'(2024). 한지에 혼합매체, 75×145cm. /갤러리현대


전시장에서 한 관계자가 김민정 작품 'Encounter'(2024)를 감상하고 있다. /갤러리현대

전시장에서 한 관계자가 김민정 작품 'Encounter'(2024)를 감상하고 있다. /갤러리현대


홍익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1991년 이탈리아 브레라 국립미술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낯선 땅에서 “내가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재료가 한지와 먹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모든 작가는 자기만의 선(線)이 있다. 피카소의 선이 다르고 마티스의 선이 다른 것처럼, 나만의 선을 찾고 싶었다. 한지를 불에 태운 것은 내 선을 찾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는 “불을 사용하면서 내 숨도 고르고 천년, 만년의 세월을 담을 수 있었다”며 “자연의 큰 힘과 함께 작업하게 됐다”고 했다.

2층 전시장 전경. /갤러리현대

2층 전시장 전경. /갤러리현대


한지의 가장자리를 촛불이나 향불로 태우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긴 검은 그을음의 선들을 겹겹이 쌓아 화면을 만들어 간다. 수행에 가까운 과정이지만, 그는 “그 과정이 너무 즐겁다. 내게는 수행이 아니라 놀이에 가깝다”고 했다. ‘타임리스’ 두 점은 ‘산’을 만들다가 버려지는 종이를 얇게 잘라 해체한 뒤, 가장자리를 불로 태우고 층층이 쌓아 올려 바다 물결 소리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그는 “물결이라는 것은 물이 마르지 않는 이상 항상 존재한다는 데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김민정, 'Zip'(2024). 한지에 혼합매체, 131×182cm. /갤러리현대

김민정, 'Zip'(2024). 한지에 혼합매체, 131×182cm. /갤러리현대


옷의 지퍼에서 모티브를 얻어 불에 태운 한지를 지그재그 형태로 엮은 신작 ‘Zip’ 연작도 처음 공개됐다. 은은한 파스텔톤의 다양한 색띠가 한 화폭에서 조화를 이룬다. 그는 “아버지가 인쇄소를 하셨는데 책 제본할 때 양쪽을 자르고 남은 종이가 지금 내가 만든 선과 똑같다. 이불집을 했던 어머니는 새벽마다 천을 그렇게 자르셨는데,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어머니가 하던 일과 똑같다”고 했다. “천 자르듯이 종이를 자르고, 어릴 때 종이로 딱지 만들고 놀던 기억을 갖고 선을 만들고…. 결국 사람은 그 쳇바퀴에서 사는 것 같다.”


처음 공개된 'Zip' 앞에 선 김민정 작가. /장경식 기자

처음 공개된 'Zip' 앞에 선 김민정 작가. /장경식 기자


작가는 “종이를 태울 땐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이 명상 단계로 들어간다”며 “불에 그을린 종이를 한 장씩 이어 붙이다 보면 상처를 감싸는 치유의 느낌이 든다”고 했다. 전시는 19일까지. 무료.

[허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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