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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세 생일 맞은 음악가, 그의 음악은 왜 여전히 특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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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세 생일 맞은 음악가, 그의 음악은 왜 여전히 특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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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영의 클래식 노트]
ECM 레이블과 아르보 패르트가 남긴 것

편집자주

20여 년간 공연 기획과 음악에 대한 글쓰기를 해 온 이지영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이 클래식 음악 무대 옆에서의 경험과 무대 밑에서 느꼈던 감정을 독자 여러분에게 친구처럼 편안하게 전합니다.


아르보 패르트. ⓒErio Marinitsch

아르보 패르트. ⓒErio Marinitsch


"침묵 속에 얼마나 큰 힘이 있을 수 있는지 가르쳐 준 그를 기념합니다."

지난 11일 인스타그램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클래식 음악 관련 계정에는 에스토니아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의 90세 생일 축하 메시지가 넘쳐났다. 그의 고국 에스토니아는 물론 세계 주요 극장들은 그의 음악 세계를 기리는 합창음악과 신작 공연, 재녹음, 워크숍과 시상식 등을 계획하고 있다. 세계 클래식계가 진심 어린 축하 메시지를 전하는 이유는, 그의 음악이 단순히 듣는 즐거움을 넘어 시대와 국경을 초월한 내면의 사유와 고요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음악계는 왜 90세 작곡가에게 이렇게 열광할까. 패르트는 1960~70년대 서구 음악계를 지배하던 복잡한 음렬주의 대신, 단순하고 명상적인 '틴티나불리(Tintinnabuli)' 양식을 창안해 음악사의 흐름을 바꾼 작곡가다. 쇤베르크의 12음 기법과 음렬주의를 따르던 초기에서 벗어난 그는, 거대하고 복잡해진 음악에 절망해 긴 침묵 끝에 음악의 기원으로 돌아갔다. 두세 개 종의 울림만으로도 아름다운 연주를 할 수 있다는 확신 속에 틴티나불리를 창안했고, 음악 형식은 14~16세기 종교음악의 단순함을 이어받았다. 교황 베네딕트 16세에게 헌정한 '주기도문',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플레이리스트에 담겼던 '아담의 애가'는 이를 노래한 연주팀이 그래미 어워드를 받는 등 큰 사랑을 받았다. 틴티나불리 양식의 대표작 '거울 속의 거울'은 영화 '그래비티' '어바웃 타임'에서, '타불라 라사', '알리나를 위하여'는 클래식 연주자들의 앙코르곡, 영화·연극·무용 공연의 배경음악으로 자주 등장했다. 음악이 만들어내는 느림과 고요는 수많은 미디어와 정보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안식처럼 다가왔다.

아르보 패르트의 생일을 축하하는 인스타그램 메시지.

아르보 패르트의 생일을 축하하는 인스타그램 메시지.


현대음악 알린 ECM레이블의 역할



아르보 패르트. ⓒKaupo Kikkas

아르보 패르트. ⓒKaupo Kikkas


패르트의 음악을 세계로 확산시킨 가장 큰 공헌자는 레이블 ECM이었다. 엔지니어 출신의 프로듀서 만프레드 아이허가 1984년 설립한 ECM은 처음에는 재즈 레이블로 출발했다. 키스 자렛, 팻 메스니, 칙 코리아, 얀 가바렉, 콜랭 발롱 등 핵심 아티스트들이 보여준 ECM 특유의 서늘하고 담백한 사운드는 유럽 재즈를 세계로 확장시켰다. 미니멀하고 세련된 앨범 커버 디자인은 레이블의 미학을 대변했고 깔끔한 외형 안에 담긴 깊이와 너비, 뛰어난 음질은 ECM 음반을 듣는다는 것만으로 근사해 보이게 만들었다. 마니아는 물론 남들과 구분 짓기를 좋아하는 힙스터들까지 끌어들이며, ECM은 레이블 자체가 하나의 문화이자 브랜드가 되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2013년 서울 인사동 대림미술관에서 열렸던 'ECM: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 전시는 젊은 문화 소비자들에게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클래식 음악 팬들에게 ECM의 의미는 더 깊다. ECM은 탄탄한 마니아층을 바탕으로 고전과 현대음악을 담은 뉴시리즈를 출범시켰다. 단순하고 절제된 구조의 앨범 커버는 현대 작곡가들의 작품과 자연스럽게 결합했고, ECM은 '침묵도 음악이다(Silence is music too)'라는 슬로건 아래 깊은 음향과 철학적 접근으로 카탈로그를 구성해 왔다. 이 미학은 명상적 미니멀리즘을 개척한 패르트와 완벽히 어울렸고, ECM 레이블의 정체성을 더욱 단단하게 완성함과 동시에 전 세계의 연주회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다.

헨리크 고레츠키, 필립 글라스, 막스 리히터 등이 새로운 음악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지만, 90세를 맞은 아르보 패르트의 존재와 그를 세계에 알린 ECM의 역할은 여전히 특별하다. 음원 시대의 편리함을 누리고 있지만, 음악시장에서 ECM과 만프레드 아이허 같은 음반 기획자와 레이블의 존재감이 턱없이 약해진 것은 대단히 아쉽다. 어렵게 생각했던 음악을 확산시키고,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장르와의 거리를 좁혀 놓았던 프로듀서의 가치는 다시 생각할 만하다.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