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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 번지는 커피향 같은 옛 기억… 중년 관객 사로잡네

조선일보 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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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 번지는 커피향 같은 옛 기억… 중년 관객 사로잡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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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물의 소리’ 관객 절반 40대 이상
슬프고 웃긴 동창들 대화에 공감
“그땐 사람이 50살 먹어서도 연애를 하나 했거든.” 이젠 고등학교 학생주임이 된 ‘나연’이 말한다. 카페 주인 ‘동호’가 덧붙인다. “난 내가 오십이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 제과 회사 영업 사원 ‘기풍’도 말을 보탠다. “중학교 졸업하고 순식간에 35년이 지났네.”

시골에서 자라며 함께 수영부에서 활동했던 동창생 동호, 기풍, 나연은 먼저 떠난 친구 ‘애리’의 장례식을 계기로 동호가 주인인 서울 변두리 카페에서 만난다. 서울 대학로 예그린씨어터에서 공연 중인 연극 ‘물의 소리’(연출 김광보)는 반지하 카페에서 하루 저녁 동안 세 친구의 대화를 따라간다. 별것 아닌 추억담에 깔깔 웃다가, 더 별것 아닌 한마디에 눈물 짓게 한다. 무대 위 동호가 내릴 때마다 객석으로 번져오는 핸드 드립 커피 향처럼 부드럽고 따뜻하다.

기풍은 두 달 전에 늦둥이 넷째 딸을 얻어 싱글벙글하고, 성질 괄괄한 나연은 여전히 친구들 군기 반장이다. 어린 시절 연애담, 소풍이나 수영 내기 시합의 즐거운 기억, 독하게 달려들지 못하고 접었기에 더 아련해진 꿈들…. 굳이 말하지 않아도 통한다. 마음이 엇갈렸던 아련한 기억도 남아 있다.

대화가 깊어질수록 묻어뒀던 상처와 후회, 말하지 못했던 진심, 과거의 사소한 순간에 담긴 특별한 의미가 하나둘 드러난다. 살다 보면 누구나 쉽게 꺼낼 수 없는 사연 몇 개쯤 속에 품게 마련. 이 연극은 그런 아픔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가슴 한편에 가시처럼 박혀 가끔씩 통증을 일으키지만, 참고 살면 또 살아지는 아픔 같은 것들.

배우들의 대화 사이사이 물소리가 들려온다. 오래된 건물 지하에 흔한 배수로 물소리인 줄 알았는데, 타이밍이 절묘하다. 미묘한 긴장과 감정의 변화, 누군가의 마음속 잠깐의 일렁임 같은 것들이 생기는 순간을 포착한다.

물소리만 가끔씩 파문을 일으키는 고요하고 잔잔한 이야기인데 관객들은 계속 웃음을 터뜨리고 또 눈물 짓는다. 친한 친구들끼리만 주고받을 수 있는 타박, 서로 엇갈리는 기억 같은 것들이 관객 자신의 기억과 공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 작가 나가이 히데미의 동명 희곡에서 도쿄에서 만난 시코쿠 출신 친구들의 이야기를 서울에서 만난 충청도 출신 친구들 이야기로 옮겼다. 섬세한 정서적 표현에 뛰어난 김광보 전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동호 역에 김민상, 박호산, 김주헌. 나연 역에 우현주, 서정연, 정운선, 기풍 역에 이석준, 이승준, 김남희 등 드라마·영화로도 익숙한 대학로 연기 장인들이 무대에 선다.

세상 풍파 겪을 만큼 겪은 나이의 관객이 봐도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대학로 소극장 무대에 오르는 것도 오랜만이다. 통상 대학로 연극·뮤지컬은 20~30대 관객 비율이 60~70%를 넘지만, 이 연극만은 40~50대 관객 비율이 거의 절반(46.9%)에 달한다.(14일 인터파크 통계 기준)

[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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