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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인사이드] 야구팀 이름, 골프 단장까지 참견하는 ‘스포츠 정치학’

조선일보 강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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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인사이드] 야구팀 이름, 골프 단장까지 참견하는 ‘스포츠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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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트럼프 대통령 ‘과도한 개입’ 논란
8일(한국 시각) 카를로스 알카라스와 얀니크 신네르가 맞붙은 US오픈 테니스 남자 단식 결승전은 예정된 시각에 막을 올리지 못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방문에 맞춰 미 비밀경호국이 뉴욕 아서 애시 스타디움 입장 대기 줄에 금속 탐지기를 설치하고 가방을 검사해 관중 입장이 지연됐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2000년 빌 클린턴 이후 현직 대통령으로는 25년 만에 US오픈 현장을 찾았는데 경기 시작이 되고도 스타디움에 들어가지 못한 팬들은 트럼프를 향해 야유를 쏟아냈다.

트럼프는 최근 스위스에 미국 주요 교역국 중 가장 높은 39%의 상호 관세를 부과했다. 공교롭게도 이날 트럼프를 초청한 롤렉스는 ‘관세 전쟁’의 가장 큰 직격탄을 맞은 대표적인 스위스 시계 브랜드였다. 트럼프가 롤렉스 VIP석에서 경기를 관람하자 미국 언론들은 “관세 문제로 트럼프의 눈치를 봐야 하는 롤렉스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초대”라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스포츠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거나 각종 스포츠 이슈에 목소리를 내는 일이 잦다. 스포츠 관련 행보가 워낙 광범위해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다. 지난 7월엔 FIFA(국제축구연맹) 클럽 월드컵 시상식에서 첼시 선수들의 우승 세리머니 때 자리를 비켜주지 않아 논란을 불렀다. 이달 말에는 뉴욕주 롱아일랜드에서 열리는 미국과 유럽의 프로 골프 대항전인 라이더컵에 참석한다. 대통령의 무게와는 어울리지 않게 사소한 문제에 ‘훈수’를 두기도 한다. 최근엔 ‘약물 논란’이 있는 로저 클레먼스의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헌액을 요구하거나, 라이더컵 미국팀 단장인 키건 브래들리가 선수로도 뛰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픽=이철원

그래픽=이철원


트럼프는 기업인 시절부터 ‘스포츠광’으로 유명했다. 골프장에 살다시피 하고 미식축구와 종합격투기, 프로 레슬링, 테니스 등 다양한 종목에 애정을 보인 트럼프는 그 과정에서 주요 스포츠 인사와 두터운 네트워크를 쌓았고, 이는 현재 정치적 자산으로 이어졌다. 데이나 화이트 UFC(미 종합격투기) 회장은 트럼프의 열성 지지자다. 이에 화답하듯 트럼프는 내년 독립기념일에 백악관에서 UFC 경기를 열겠다고 발표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스포츠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트럼프는 대중이 주목하는 스포츠를 정치적 이미지 형성과 외교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트럼프에게 2026년 북중미 월드컵과 2028년 LA 올림픽이 재임 기간 미국에서 열리는 것은 큰 호재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상징적 이벤트를 통해 그는 자신의 슬로건인 ‘MAGA(Make America Great Again)’를 다시 강조하고, 강력한 지도자로서의 이미지를 널리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북중미 월드컵 조 추첨식은 당초 라스베이거스 개최가 유력했으나, 트럼프는 최근 백악관이 있는 워싱턴DC에서 열겠다고 발표했다. 영국 가디언은 “월드컵이 트럼프의 장난감이 됐다”고 비꼬았다.

트럼프가 스포츠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국제정치 전문가 이신화 고려대 교수는 “트럼프가 인종차별 논란으로 이름을 바꾼 NFL 워싱턴 커맨더스(옛 레드스킨스)나 MLB 클리블랜드 가디언스(옛 인디언스)에 과거 명칭으로 돌아가라고 주장하거나, 트랜스젠더 선수의 올림픽 출전을 전면 배제하려는 것은 모두 그의 정치적 성향과 맞닿아 있는 것”이라며 “보수적 색채를 부각해 지지층 결집을 꾀하는 전략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트럼프는 “명칭을 바꾸지 않으면 워싱턴 구단의 신구장 건설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협박성 발언을 하기도 했다.


다만 트럼프의 ‘스포츠 러시’는 팬들과 선수들에게 반감을 사는 부작용도 낳고 있다. 실제로 이번 US오픈 주최 측은 관중들의 야유를 의식해 결승 경기 중 트럼프가 화면에 잡히는 장면을 중계에서 제외해 달라고 방송사에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의 1기 재임 당시인 2018년에는 NFL 우승팀 필라델피아 이글스와 NBA 우승팀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가 백악관 초청을 거부하는 이례적인 사태도 벌어졌다. 미국 4대 스포츠 우승팀이 백악관을 방문하는 오랜 전통이 깨진 것이다.

[강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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