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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 막혔는데, 어떻게 공장 짓나"…韓 취업비자 신설론 커진다

이데일리 김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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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 막혔는데, 어떻게 공장 짓나"…韓 취업비자 신설론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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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LG엔솔 공장 무더기 체포 파장]
전시 포로 수송 연상 시킨 단속 현장
'ESTA 출장' 제동…삼성 등도 긴장감
韓 특별취업비자 'E4' 신설 설득 필요
[이데일리 김정남 기자] 무장 요원들을 태운 채 줄지어 들어오는 군용 차량. 굉음을 내며 진입하는 헬리콥터. 소총 등으로 무장한 채 공장 건물 입구에 서 있는 10여명의 마약단속국(DEA) 요원들. 일렬로 서서 호송 버스에 손을 짚은 채 손·발을 쇠로 된 체인으로 결박당하는 한국인 추정 직원들.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이 공개한 지난 4일(현지시간)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HL-GA) 급습 현장 영상은 마치 전시 포로 수송을 연상시킬 정도로 극도의 공포감이 느껴졌다. 영상에 나온 일부 직원들의 근무복 조끼에는 HL-GA를 비롯해 LG CNS, DSK 메카닉, 리맥스개발(LEEMAX), 탑엔지니어링 등 관련 협력사 추정 이름들이 보였다.

(그래픽=김일환 기자)

(그래픽=김일환 기자)




전시 포로 수송 연상시킨 단속 현장

HL-GA는 현대차와 LG에너지솔루션이 지난 2023년 설립 계약을 한 합작 공장이다. 두 회사의 지분은 각각 50%씩이다. HL-GA와 주요 협력사들은 내년 초 가동을 목표로 내부 설비 공사, 생산 장비 반입 등에 속도를 내던 차에 이번 사태에 맞부딪혔다. 내년 초 공장 가동은 어려워진 셈이다.

영상 마지막에는 체인으로 결박당하고 수갑을 찬, 긴장된 표정의 한국인 추정 직원들이 호송 버스에 올라탔다. 이들은 HL-GA 공장에서 차로 2시간여 떨어진 포크스턴 ICE 구치소에 구금된 것으로 알려졌다. 구금된 LG에너지솔루션 임직원은 47명(한국 국적 46명·인도네시아 국적 1명)이다. 관련 설비 협력사 소속 인원은 250여명이다. HL-GA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멕시코 출신 미국 영주권자들도 대거 잡혀갔다고 한다.

‘ESTA 출장’ 제동…삼성 등도 긴장

이들이 돌연 이역만리의 구치소에 수감된 것은 비자 문제 때문이다. 미국 당국이 합법적인 취업비자 없이 일하는 이들을 단속한 것이다. 국토안보수사국(HSI)의 스티븐 슈랭크 조지아·앨라배마 담당 특별수사관은 이를 두고 “(모든 기업들은 미국에) 합법적인 방식으로 투자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 현지에 공장을 둔 한국 기업들이 숙련 인력을 보내려면 미국 정부로부터 관리자급 주재원비자(L1)를 받아야 한다. 이들은 통상 현지에서 3~5년 일한다. 다만 많은 중소기업들은 L1 비자가 높은 연봉, 체재비, 의료보험 등 비용이 큰 만큼 E2 비자를 통해 현지에 보낸다. 그러나 L1이든 E2든 무한정 미국에 파견 보낼 수는 없다.


일부 미국 정치인들이 거론하는 전문직 취업비자(H-1B) 인력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으로 어렵다. H-1B는 ‘뺑뺑이’ 추첨을 통해 이뤄지는데, 암묵적으로 미국 빅테크들을 위한 할당이 있다. 인도, 중국 출신 IT 개발자들이 이를 대부분 가져가는 이유다.

(출처=미국 ICE)

(출처=미국 ICE)




상황이 이런 탓에 단기로 몇 달간 미국에 넘어가 일하는 경우에는 단기 상용 비자(B1) 혹은 전자여행허가(ESTA)가 관행처럼 여겨졌다. 산업계 한 고위관계자는 “반도체, 배터리 등은 높은 공장 난이도, 기술 유출 우려 등을 이유로 자국 숙련 인력들을 대거 파견할 수밖에 없다”며 “그런데 주재원을 무한정 보낼 수는 없는 만큼 수시로 출장자들이 가야 한다”고 토로했다. 현재 법 제도 하에서는 ‘ESTA 출장’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대만 TSMC가 애리조나 공장을 지으면서 비자 문제로 고민이 컸다는 것은 공공연한 얘기다.

그런데 이번 사태는 ESTA 출장 관행에 미국 당국이 공식적으로 제동을 건 것이다. 이는 곧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삼성SDI, SK온 등 미국 내 생산공장을 건설 중이거나 계획 중인 곳들 역시 이번 사태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의미다. LG에너지솔루션은 당분간 미국 출장을 전면 중단하기로 했다. 다른 상당수 기업들은 이미 계획했던 ESTA 출장도 재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韓 특별취업비자 ‘E4’ 신설 설득 필요

이번 사태가 어떻게 흘러갈 지는 예단이 어렵다. 미국 정부가 비자 규정을 엄격하게 적용하면 구금이 장기화할 우려도 있다. 아직 석방 시기를 가늠할 수 없다는 얘기다. 외교가, 법조계 등에 따르면 구금 직원들은 즉시 추방, 이민법원을 통한 추방 재판 등의 선택지가 있을 수 있다. 추후 시간, 비용 등을 감안한 개인의 의사를 통해 결론이 날 가능성이 있다.

김기수 LG에너지솔루션 최고인사책임자(CHO)는 현장 대응을 위해 이날 오전 미국으로 출국했다. 그는 “조속한 석방이 최우선”이라고 했다. 정부도 대응에 나섰다. 이재명 대통령은 “신속한 해결을 위해 총력 대응하라”고 지시했다고 조현 외교부 장관이 지난 6일 합동대책회의에서 전했다. 조 장관은 방미 일정을 조율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산업계에서는 단기적으로 정부가 구금자 석방에 집중하되, 중장기적으로는 한국인 특별 취업비자 신설을 설득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미국은 캐나다와 멕시코의 학사학위 이상 소지자에 비자를 무제한 발급하고 있다.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싱가포르와 칠레는 매년 각각 5400개, 1400개의 전문직 비자를 받고 있다. 호주는 E3 특별비자를 연 1만500개를 받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이런 비자 할당이 없는 실정이다.

호주와 유사한 방식으로 E4 특별비자 연 1만5000개를 발급하는 ‘한국 동반자 법안’이 2013년부터 미국 의회에 계류돼 있지만, 무관심 속에 10년 넘게 표류했다. 또다른 재계 고위관계자는 “E4 비자만 있어도 첨단 제조 공장을 가동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