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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예술로, 삶을 혁신으로…위대한 여성 건축가 페리앙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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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예술로, 삶을 혁신으로…위대한 여성 건축가 페리앙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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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로트 페리앙이 줄자로 치수를 재고 있다. 에어 프랑스 도쿄 샤를로트 페리앙 아카이브, 을유문화사 제공

샤를로트 페리앙이 줄자로 치수를 재고 있다. 에어 프랑스 도쿄 샤를로트 페리앙 아카이브, 을유문화사 제공


“일을 해야 해, 샤를로트. 일은 자유야.”



어머니의 말을 가슴에 새긴 딸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건축가 중 한명이 되었다. 프랑스 건축가이자 디자이너 샤를로트 페리앙(1903~1999)의 회고록이 번역돼 나왔다. ‘샤를로트 페리앙’(을유문화사)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마무리한 책으로, 양차 세계대전을 관통하고 평생 유럽·남미·아시아를 오가며 살았던 한 여성 건축가의 삶과 모험을 다뤘다.



페리앙은 모더니즘의 거장 르코르뷔지에의 동료로도 유명하다. 현대 산업 소재인 철제 프레임과 존재감 있는 가죽으로 구조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엘시(LC) 체어’ 시리즈는 한국에서 짝퉁까지 유행할 정도로 큰 사랑을 받았다. 이 시리즈는 오랫동안 ‘르코르뷔지에 의자’로 알려졌지만, 페리앙이 주도한 작품이라는 것이 밝혀져 페리앙 사후 20년 만에 ‘그랑 콩포르’, ‘셰즈 롱그’ 등으로 제 이름을 되찾았다. 책에도 이 의자들의 탄생 일화가 담겨 있다.



페리앙은 르코르뷔지에, 그의 사촌 피에르 잔느레와 함께 10년간 삼총사처럼 일했다. 르코르뷔지에는 건축의 큰 그림을 그렸고, 피에르는 구조적인 부분을 담당했으며 페리앙은 가구 디자인과 함께 실내 공간의 쓰임새를 제안했다. 하지만 첫 만남은 까칠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하지 않았던 1927년, 장식미술연맹학교에서 디자인을 공부한 그는 살롱 도톤에 출품한 ‘지붕 아래 바’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앞날이 불투명했기에 르코르뷔지에를 찾아간다. 르코르뷔지에는 “우리는 쿠션에 수놓지 않아요”라고 잘라 말하며 여성인 페리앙을 문전박대했다. 그러나 얼마 뒤 르코르뷔지에는 페리앙의 재능을 눈으로 확인하고 함께 일하기로 한다.



르코르뷔지에, 샤를로트 페리앙, 피에르 잔느레가 함께 만든 셰즈 롱그. 페리앙의 지분이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9년 파리 루이뷔통재단미술관과 2021년 런던디자인뮤지엄 등에서 열린 회고전에서 그의 위상이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르코르뷔지에, 샤를로트 페리앙, 피에르 잔느레가 함께 만든 셰즈 롱그. 페리앙의 지분이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9년 파리 루이뷔통재단미술관과 2021년 런던디자인뮤지엄 등에서 열린 회고전에서 그의 위상이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페리앙은 더 나은 디자인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고 확신했다. 태생이 반골이었거니와 가구 디자인과 실내 건축 설계에서도 진보적인 색채를 숨기지 않았다. 그는 자신들이 만든 의자가 대중보다 특정 계층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인정했고, 공동주택 프로그램에는 구조적으로 아름다우면서도 합리적인 가격의 목재 의자를 썼다. 주방은 개방하고 거실 쪽으로 연결해 일하는 여성이 소외되지 않도록 했다. 그는 오늘날 주거 문화의 기틀을 만든 혁신가였다.



페리앙은 꽤 활달하면서 솔직한 성정이었던 것 같다. 첫 남편과 몇년 살지 못하고 이혼했는데 이 대목에서 그는 “자유로웠다”라고 쓴다. 그 뒤 동료였던 피에르 잔느레의 짝사랑을 받아들여 연인이 되었지만 헤어졌다. 하지만 두 사람은 누구보다 잘 맞는 동료로서 1930년대 신소재와 새로운 기술을 사용한 혁신적인 건축양식을 추구했다. 그러나 르코르뷔지에의 모더니즘과 과거의 전통 양식 계승을 중요하게 여기는 아카데미즘이 충돌했다. ‘근대건축국제회의’가 중심이 되어 20세기 건축과 도시계획이 발전하고 있었고, ‘현대예술가연합’을 중심으로 창의적인 창작물을 지원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모두 사회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



르코르뷔지에, 샤를로트 페리앙, 피에르 잔느레가 함께 만든 의자들. 페리앙의 지분이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르코르뷔지에, 샤를로트 페리앙, 피에르 잔느레가 함께 만든 의자들. 페리앙의 지분이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페리앙이 살았던 시기는 세계사적으로도 큰 변동이 있었던 때였다. 1·2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미소 냉전이 시작되었으며 제국주의가 변화를 겪으면서 세계는 격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페리앙은 사회적 참여를 마다하지 않았다. 히틀러와 파시즘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 페리앙은 1932년 혁명작가예술가협회에 가입하고 전쟁과 파시즘에 반대하는 편에 섰다. 다양한 화가와 작가들을 만나며 “불나방처럼” 어우러졌고 “아, 잘될 거야, 잘될 거야…”라는 혁명가를 부르며 귀가하곤 했다. 변증법을 배우려고 노동대학에 다녔으며 파시즘에 대항하는 일간지에 수납과 관련된 글을 연재했다. “수납은 일상 행동, 질서와 조화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다양한 가구로 혼잡해진 공간을 해방해야 한다.”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여성들은 전쟁터에 나간 남성들의 일자리를 대신했고,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1922년엔 여성들을 가사노동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가정용품박람회가 열렸는데 이 명칭은 이후 가정예술박람회로 변경되었다. ‘가정예술’이 부르주아 예술이라며 비판받을 때 페리앙은 말했다. “객차를 끌기 위해서는 기관차가 필요한 법이지 않은가?” 가정예술의 발전은 삶을 혁신하는 기관차였다.



샤를로트 페리앙이 1928년 디자인하고 독일에서 제작한 회전 의자. 크롬 도금 처리된 관형 강철에 금속 스프링 위에 깃털과 다운 쿠션이 달려 있다.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소장품. 위키미디어 코먼스

샤를로트 페리앙이 1928년 디자인하고 독일에서 제작한 회전 의자. 크롬 도금 처리된 관형 강철에 금속 스프링 위에 깃털과 다운 쿠션이 달려 있다.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소장품. 위키미디어 코먼스


2차 대전 시기, 폭격을 맞은 파리는 폐허가 되었다. “부자들은 떠났고, 민중은 후송되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 (…) 가난한 민중은 이제 유목민이 되었다.” 페리앙은 안타까워했다. 르코르뷔지에와 결별한 뒤 1940년, 페리앙은 일본 정부의 장식예술 디자이너 고문으로 위촉되어 도쿄로 떠난다. 그곳에서 자연과 문화와 전통을 연구하고 자신의 작업에 동양의 유산을 활용하려고 노력했다. 전쟁 통에 그는 일본에서 추방되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반도로 도피했다. 친가와 외가 양쪽으로 장인의 피를 물려받은 페리앙은 농업인, 장인, “자기 손으로 먹고사는 이들”을 사랑했다. 베트남 하노이에서도 ‘공예 사랑’을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인도차이나 공예품 생산과 무역에 대한 임무를 맡게 해달라고 프랑스 정부를 설득했다. 당시 담당자로서 페리앙을 냉정하게 대하던 경제국장은 결국 그의 남편이 되었다. 1943년 두 사람은 결혼하고 폭격 속에 딸을 낳는다. 송환선을 타고 프랑스로 귀환하기까지 총 6년이 걸렸다.



1928년 르코르뷔지에(왼쪽)와 샤를로트 페리앙. ⓒPierre Jeanneret, 을유문화사 제공

1928년 르코르뷔지에(왼쪽)와 샤를로트 페리앙. ⓒPierre Jeanneret, 을유문화사 제공


유럽으로 돌아온 뒤 페리앙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나치의 강제수용소나 성모상을 본뜬 고문 도구들을 보고 그는 경악한다. 삶의 진보로 이어져야 할 건축과 미술이 인간을 말살하는 데 사용되는 것을 보고 비탄에 빠졌지만 그는 자기 작업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맨주먹으로 시작하면서도 자신의 경력과 경험을 믿었고, “주거 예술”이란 단어를 만들었으며 이를 “삶의 예술”로 승격시켰다. 페리앙은 일본과 아시아의 경험을 통해 여백의 미와 잘 설계된 수납공간을 중시했다. 그 뒤 에어프랑스에서 일한 남편을 따라 일본, 브라질 등지에서 살면서 그는 그곳 주민들의 삶과 생활을 흡수했다.



1935년 샤를로트 페리앙. ⓒFonds d’archives de Charlotte Perriand

1935년 샤를로트 페리앙. ⓒFonds d’archives de Charlotte Perriand


프랑스로 돌아와선 농지를 변경한 스키 리조트를 만들면서 대규모 프로젝트를 실행한다. 1968년 몽블랑을 마주하고 개장한 레자르크 스키 리조트는 그가 “20년 이상의 직업적 삶을 바친 모험”이었다. 그는 산악 명소들이 오염되는 것을 두려워했지만 스키가 마을을 살리고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뿌듯함을 느꼈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성장한 페리앙은 누구보다 자연을 아꼈고, 무엇보다 산을 사랑했다. 그는 소비를 위해 인간이 경제적 노예 상태로 살아가는 것에 반대했으며, 신기술을 이용했지만 이 기술이 인간의 삶을 지배하도록 두어서는 안 된다고도 생각했다. 소외되지 않는 주체로서 인간이 좀 더 아름답고 유기적으로 연대하며 살 수 있다는 점을 굳게 믿었다. 평생 “또 다른 성찰의 길, 탐구의 길”을 추구했다.



우리 삶을 예술로 승화하는 데 기여한 20세기 일상의 혁신가를 본격적으로 만날 수 있는 귀한 번역본이다. 을유문화사가 낸 ‘현대예술의거장’ 시리즈 23번째.



샤를로트 페리앙 l 샤를로트 페리앙 지음, 유상희 옮김, 을유문화사, 3만8000원

샤를로트 페리앙 l 샤를로트 페리앙 지음, 유상희 옮김, 을유문화사, 3만8000원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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