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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와!” 르네 마그리트<br>[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조선일보 이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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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와!” 르네 마그리트<br>[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서울맑음 / -3.9 °
1967년 8월 15일 69세
르네 마그리트 그림 '골콘다'

르네 마그리트 그림 '골콘다'


흐려진 파란 하늘 아래 붉은 지붕 인 갈색 건물이 늘어서 있다. 비는 내리는데 물방울이 아니다. 중절모를 쓰고 수트를 갖춰 입은 뭇 남성 신사들이다.

벨기에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1898~1967)가 1953년 그린 그림 ‘골콘다(golconda)’이다. 골콘다는 사전을 찾아보니 다이아몬드 가공으로 부를 누린 인도 고대 도시. 무진장의 부, 보물 더미, 무한의 금고라는 뜻이 있다. 하늘에서 중절모를 쓸 정도로 부유한 남자들이 비처럼 내린다면 ‘보물 더미’이기도 하겠다.

르네 마그리트 1961년.

르네 마그리트 1961년.


1982년 미국 여성 그룹 웨더 걸스 노래 ‘잇츠 레이닝 멘(It's Raining Men)’

1982년 미국 여성 그룹 웨더 걸스가 발표한 댄스곡 ‘잇츠 레이닝 멘(It’s Raining Men)’은 이 그림을 보고 만든 노래 같다. ‘Get ready all you lonely girls(외로운 여자들 준비해)/ And leave those umbrellas at home(우산은 집에 두고 나와)’라고 말한 뒤 ‘It’s raining men! Hallelujah!(남자들이 비처럼 내려! 할렐루야!)’ 흥겹게 노래한다. ‘I’m gonna go out to run and let myself get/ Absolutely soaking wet!(뛰어나가 나 자신을 맡길 거야/ 완전히 흠뻑 젖을 거야)’라며 욕망을 감추지 않는다.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르네 마그리트, 골콘다'. 2011년 6월 29일자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르네 마그리트, 골콘다'. 2011년 6월 29일자


서양미술사를 전공한 우정아 KAIST 교수는 이렇게 해설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부동자세의 남자들은 풍요를 꿈꾸며 틀에 박힌 일상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소시민들에게 바치는 마그리트의 신선한 유머다. 물론 축축한 장맛비 대신 단정하게 차려입은 신사들이 쏟아지는 광경은 아직 짝이 없는 여성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 상상은 해 봤을 것이다.”(2011년 6월 29일 자 A30면)

2010년 8월 10일자. '신문은 선생님'.

2010년 8월 10일자. '신문은 선생님'.


21세기는 AI(인공지능) 발전으로 현실과 비현실이 점차 구분되지 않는 시대로 가고 있다. 현실을 뛰어넘는 초현실 그림을 그린 마그리트는 앞으로 더 주목받는 작가가 될 전망이다. 1961년 그린 ‘빛의 제국’은 2022년 영국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7980만달러(957억원)에 낙찰됐다. 당시 유럽에서 낙찰된 그림 중 둘째로 비싼 가격이었다.

르네 마그리트 작품 '빛의 제국'이 957억원에 낙찰됐다. 2022년 3월 4일자.

르네 마그리트 작품 '빛의 제국'이 957억원에 낙찰됐다. 2022년 3월 4일자.


‘빛의 제국’은 낮과 밤이 공존하는 그림이다. 숲속 집은 어둠에 잠겼다. 창에는 옅은 불빛이 비치고 거리엔 하얀 가로등이 켜졌다. 그런데 시선을 위로 올리면 환한 대낮이다.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두둥실 떴다. 마그리트는 낮과 밤의 대비가 마음에 들었는지 ‘빛의 제국’을 유화로만 17점 남겼다.


우정아 교수는 “마그리트는 이처럼 익숙한 현실의 사물을 어울리지 않는 맥락에 배치해서 일상을 낯설거나 충격적으로 만들었다. 이 기법을 ‘데페이즈망’이라고 불렀다. 글자 그대로는 ‘고향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라며 “고향을 떠났다고 모두가 항상 불안하기만 한 건 아니다. 낯선 풍경은 오히려 신선하고,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면 삶에 활기가 생기며, 멀리 떨어져 봐야 고향의 실체도 바로 보인다”(2025년 7월 22일 자)고 했다.

2020년 5월 8일자. 르네 마그리트 전시회 기사.

2020년 5월 8일자. 르네 마그리트 전시회 기사.


마그리트는 ‘우리가 실재(實在)라고 여기는 것이 실재가 아니다’라고 그림을 통해 말한다. 유명한 ‘이미지의 반역’은 담배 파이프를 그린 그림이다. 마그리트는 담배 파이프를 그린 화면 아래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적었다. 파이프라는 단어가 실재 파이프가 아닌 것처럼 파이프를 그린 그림이 파이프 자체가 아니라는 주의 깊은 고찰이다.

현대 미술이란 사실을 왜곡하고 그저 말장난하는 것 아니냐고? 베스트셀러 ‘생각의 탄생’에 나오는 피카소 이야기가 답변이 된다.


하루는 피카소가 기차를 타고 가다가 옆 좌석의 신사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신사는 현대 예술이 실재를 왜곡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피카소는 그에게 실재의 본보기가 있다면 그것을 보고 싶다고 했다. 신사는 지갑에서 아내의 사진을 꺼냈다. “이거요! 내 아내와 정말 똑같은 사진이죠.”

피카소는 사진을 받아 들고 아래에서도 보고 위에서도 보고 한참 동안 살펴본 뒤 말했다. “당신 부인은 아주 작군요. 게다가 납작하고요.” 피카소는 “예술이란 사람들이 진실을 깨닫게 하는 거짓말”(2007년 4월 21일 자 D7면)이라고 했다.

[이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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