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청’ 연출가 요나 김 등 獨 창작진 인터뷰
과거에 갇힌 심청에서 ‘오늘의 이야기’ 찾아
대본 난상토론…감정 이입 연습 때 눈물바다
라이브 카메라로 ‘원초적 날것’ 판소리 담아
과거에 갇힌 심청에서 ‘오늘의 이야기’ 찾아
대본 난상토론…감정 이입 연습 때 눈물바다
라이브 카메라로 ‘원초적 날것’ 판소리 담아
독일 만하임 국립극장 상임 연출가 요나 김이 대본을 쓰고 연출을 맡은 국립극장과 전주세계소리축제의 협업작 ‘심청’ [Benjamin Luedtke 2025. All rights reserved]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매장(埋葬)을 금지한 크레온의 명령을 거부해 사형당한 오이디푸스의 딸 안티고네,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에게 복수하는 딸 엘렉트라, 사랑의 질투에 눈먼 전 연인에게 죽임을 당한 카르멘, 그리고 ‘심청’.
“독일어권 문화에서도 헌신하고 희생하는 여성 캐릭터는 수없이 그려져 왔어요.”
무대 디자인을 맡은 헤르베르트 무라우어(Herbert Murauer)가 입을 열자, 무대·의상 협력 디자이너 프랑크 쇤발트(Frank Schönwald)는 “동화에서도 마찬가지”라며 “이 작품들 안에서 여성들의 결말은 늘 좋지 않았다”고 말을 보탰다. 두 사람의 이야기에 조연출로 작품에 참여한 다니엘라 키제베터(Daniela Kiesewetter)가 다른 시선을 더했다.
“흥미로운 것은 시대에 따라 작품들은 꾸준히 변형되고 있다는 점이에요. ‘심청’도 마찬가지예요. 사회와 문화에 따라 달리 읽히고 있어요.”
질문 하나 던졌더니, 수많은 생각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한국 고전 ‘심청’에 관한 이야기였다. 연출가 요나 김(독일 만하임 극장 상임 연출)이 쓴 독일어 대본 ‘심청’을 받아 든 때부터 짧게는 1년 6개월, 길게는 2년간 작품의 세계를 탐험한 연출진의 주제는 금세 확장됐다. 과거에 갇혔던 ‘심청’ 안에서 저마다 ‘오늘의 이야기’를 찾고, 지금의 우리 사회를 돌아보며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독일에서 ‘심청 어벤저스’가 날아왔다.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오페라 연출가로 활동하는 유일한 한국인 요나 김을 중심으로 그와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춘 연출진(무대 디자이너 헤르베르트 무라우어, 의상 디자이너 팔크 바우어, 영상 감독 벤야민 뤼트케, 무대 의상 협력 디자이너 프랑크 쇤발트, 조연출 다니엘라 키제베터)이 ‘심청’(8월 13~14일 전주, 9월 3~6일 서울)을 위해 뭉쳤다. ‘오페라 장인’들이 선보이는 우리 소리의 무대다.
최근 국립극장에서 만난 ‘심청’의 독일 연출진은 “우리에겐 완전히 새로운 소리와 작업이지만, 이 이야기는 인류 공동체 안에서 끊임없이 반복된 서사”라고 입을 모았다.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에서 오페라 연출가로 활동하는 요나 김과 조연출 다니엘라 키제베터. [국립극장 제공] |
가부장적 가치관 vs 강인한 여성…‘심청’ 때문에 난상토론
“벤지(영상 감독 벤야민 뤼트케의 애칭), 프로페셔널!”
심청 역을 맡은 김우정의 리허설 현장. 억센 뱃사람들에 이끌려 인당수로 뛰어들어야 하는 장면에서 영상을 담당한 벤야민 뤼트케(Benjamin Lüdtke)는 “(김)우정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던 중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의 말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며 웃었다.
지난 6월 말 한국에 도착한 ‘심청’ 어벤저스는 한국살이 내내 ‘심청’에 빠져있다. 국립극장 연습실은 너나없이 ‘눈물바다’라고 한다. 요나 김 연출가는 “예술은 좀 거리감이 있어야 하는데 다들 왜 그렇게 이입하는지, 연습 때마다 입을 벌리고 보는 데다 너무 울어 다음 일정을 진행하지 못할 정도”라고 했다.
‘효심 지극한 딸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진 이야기.’ 지극히 한국적이라 생각했던 고전은 ‘외부인의 시선’을 입자 ‘공통의 서사’로 다시 자리했다. 의상 디자이너 팔크 바우어(Falk Bauer)는 “‘심청’은 특정 나라, 문화와 상관없이 보편적인 이야기이기에 연습 때마다 감정이 깊어진다”고 했다.
이번 ‘심청’ 프로젝트는 지난 2023년 닻을 올렸다. 국립극장과 전주세계소리축제위원회가 공동 제작, 2017년 오페라 전문지 오펀벨트가 선정한 ‘올해의 연출가’, 2020년 독일의 권위 있는 예술상인 파우스트상 후보에 오른 요나 김과 무대 디자이너 헤르베르트 무라우어, 의상 디자이너 팔크 바우어, 영상 감독 벤야민 뤼트케, 무대·의상 협력 디자이너 프랑크 쇤발트, 조연출 다니엘라 키제베터가 제작진으로 참여했다. 이들이 판소리 작업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연출진은 오랜 시간 이 작품을 낱낱이 뜯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무라우어는 “‘심청’은 사랑과 가족, 헌신이라는 큰 주제를 담으며 한국 사회 속 가부장적 가치관의 흐름을 보여준다”며 “한국 사회 전반에서 아직 가부장적 분위기가 남아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요나 김 연출가와 대구국제오페라축제에 올린 ‘니벨룽의 반지’(2022)를 비롯해 한국에서만 세 번째 작업이라는 그는 “극장 안엔 무수히 많은 여성이 실무를 담당하지만, 극장장은 언제나 남성이었다”며 “주요 극장의 권력구조를 보고 이같이 느꼈다”고 말했다.
독일 만하임 국립극장 상임 연출가 요나 김과 무대 디자이너 헤르베르트 무라우어, 의상 디자이너 팔크 바우어 [요나 김 연출가 제공] |
그의 이야기에 난상 토론이 시작됐다. 요나 김 연출가는 “(이는) 단지 표피적으로 바라볼 수 없는 복합적이고 보편적인 문제”라고 했다. 그는 “한국뿐만 아니라 독일에서도 같은 구조가 이어지고 있다. 다만 좀 더 세련되게 포장으로 현대에 찾아올 뿐”이라며 “그 안에선 여성들을 통해 무수히 많은 이야기와 변화가 일고 있으니, 한국을 여전히 가부장 사회라고만 규정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키제베터 조연출은 “그래서 ‘심청’이라는 이야기가 흥미롭다”고 했다. 요나 김 연출가의 ‘심청’은 당연하다 여겨진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며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키제베터 조연출은 “시대와 세대에 따라 이야기 속 여성의 희생과 헌신이 달리 읽히고 있다”며 “이 이야기의 숨은 힘은 여성의 강인함에 있다”고 봤다.
“시공을 초월한 의상·상상하게 하는 공간·이면 비춘 영상”
‘하늘이 내린 효녀’ 심청이 달라졌다. 보수적 가치관은 내던졌고, 대목마다 잘근잘근 곱씹었다. 최장 15년, 긴 시간 호흡을 ‘어벤저스 군단’은 ‘심청’ 대본을 두고 무수히 많은 논의를 통해 하나의 세계를 창조했다. 작업에 돌입한 순간부터 ‘작품은 함께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라고 강조하는 이들은 오랜 시간 호흡을 맞췄기에 그들끼리 통하는 언어가 만들어졌다. 이것이 매 작업 ‘좋은 기반’이 됐다고 한다.
이번 ‘심청’에선 고전을 재해석했다는 점을 반영, 의상과 무대에서도 ‘타임리스’를 콘셉트로 삼았다. 바우어는 “현대와 고전이라는 시공을 초월한 공통 분모가 되는 의상을 만들고자 했다”며 “시대를 초월해 관객들이 금방 이해할 수 있는 캐릭터를 표현하는 의상”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현대는 “시간적 의미가 아닌 모더니즘”이라고 요나 김 연출가는 덧붙였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소녀라고 할 때 떠올리게 되는 국경을 초월한 이미지를 담은 것”이라는 설명이다. 당연히 한복도 등장한다. 바우어는 “아름다운 한복의 표면만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귀띔했다.
“의상을 통해 우린 패션쇼를 하는 것도 고전 의상 박물관을 여는 것도 아니에요. 스토리를 이해하기 위한 명징한 매체로서의 의상을 선보이고자 했어요.” (바우어·요나 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에서 오페라 연출가로 활동하는 유일한 한국인 요나 김(왼쪽 두 번째)을 중심으로 그와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춘 무대 디자이너 헤르베르트 무라우어, 의상 디자이너 팔크 바우어, 무대 의상 협력 디자이너 프랑크 쇤발트, 영상 감독 벤야민 뤼트케 [요나 김 연출가 제공] |
무대도 고전을 뒤집듯 전형성을 깼다. ‘심청’이라고 할 때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초가집 이미지와 같은 ‘클리셰’를 피했다고 요나 김 연출가는 귀띔한다. 무라우어는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 나의 바람”이라며 “고전적 무대, 현대적 무대를 떠나 관객이 이 작품이 ‘심청’이라는 것을 스스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했다.
‘심청’에선 그간 국내 공연 무대에선 소극적으로 다뤄졌던 라이브 카메라를 중요한 장치로 활용한다. 촬영을 담당한 벤야민 뤼트케가 무대에 함께 올라 무대 위 천태만상 인간을 담아낸다. 그는 관객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관객이 포착하지 못한 감정을 읽어내며, 고전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 넣는다. 요나 김 연출가가 재해석해 비튼 인물과 이야기를 보여주는 장치가 바로 영상이다. 요나 김 연출가는 “나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고 촬영할 수 있는 사람은 벤지 밖에 없다”고 말한다. 독일에서부터 요나 김 연출가와 함께 해온 뤼트케는 한국에선 국립오페라단 ‘탄호이저’(2024), ‘니벨룽의 반지’(2022) 등의 무대에 섰다.
‘심청’이 만드는 소리에 맞춘 유연한 움직임과 감각적인 영상은 이 무대의 중요한 볼거리 중 하나다. 악보 속 음표를 무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그의 움직임 자체가 음악이자 연출이다. 뤼트케는 “판소리는 처음 들었지만, 같은 음악이기에 계속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몸에서 리듬감이 만들어진다”며 “‘심청’의 주인공은 판소리 자체이기에, 그동안의 오페라 작업과 달리 이번 무대에선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원초적인 날 것의 음악·연약함을 드러낸 소리”…연습 때마다 오열
‘심청’의 강력한 힘은 ‘판소리’에 있다. 독일 연출진은 난생처음 듣는 소리에 완전히 매료됐다고 입을 닳도록 이야기한다. 요즘 이들의 플레이리스트엔 한국의 전통 소리로 빼곡히 채워졌다.
쇤발트 협력 디자이너는 “오페라와 달리 판소리는 인간 본연의 원초적이고 원형적인 목소리”라며 “수성 악기에 즉흥적으로 만들어가는 소리가 굉장히 생동감이 있다”고 말한다. 키제베테 조연출은 “리듬이 너무나 새롭고, 음악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인상적“이라며 “특히 연습하며 함께 음악을 만들어가는 즉흥성, 서로 눈을 맞추면 바로 음악이 나오는 감각이 놀라웠다”고 했다.
독일 만하임 국립극장 상임 연출가 요나 김이 대본을 쓰고 연출을 맡은 국립극장과 전주세계소리축제의 협업작 ‘심청’ [Benjamin Luedtke 2025. All rights reserved] |
최소 대여섯 살부터 소리꾼 길을 걸어온 장인들은 독일에서 온 창작진을 완전히 홀리고 있다. 눈물을 쏟는 날도 하루 이틀이 아니다. 뤼트케는 “매번 연습 때마다 음악을 듣는데, 연습 이후에도 그 음악이 머릿속에 맴돈다”며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해도 음악이 머리와 가슴에 남아있다”며 감탄했다. 뤼트케와 의상 디자이너 팔크 바우어는 ‘심청 어벤저스’ 팀의 ‘소름’과 ‘오열’ 담당이다.
“심청이 아버지를 구하려는 장면에서 매번 울게 되고, (김)준수가 노래를 시작하면 모두가 고요해지며 숨을 멎어요. 너무나 놀라운 것은 판소리는 우리에게 완전히 낯선 음악인데 그것을 통해 한국인과 같은 감정을 느낀다는 점이에요. 내면을 건드리는 날 것의 음악, 캐릭터의 약점과 연약함을 드러내는 소리가 바로 판소리더라고요.” (팔크 바우어)
판소리를 마주하며 다양한 감정을 느끼기는 요나 김 연출가도 마찬가지다. 그는 “각기 다른 세계관을 품은 음악은 그 문화권의 건축물과 닮았다. 오페라 음악이 유럽의 거대한 성과 같은 구조라면 판소리는 여백이 많고 자연에 가까운 우리나라의 건축과 비슷하다”며 “사람의 목소리와 수성 악기 몇 개로만 구성, 어떠한 보호막도 없이 알몸의 상태로 존재해 보다 직접적으로 와닿는다”고 했다.
한국의 전통 장르인 판소리는 이들에게 ‘미지의 세계’다. 익숙한 장르를 벗어나 마주한 이 작업에 대해 요나 김 연출가는 “새로운 세계로 몸을 던져 낯선 도전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했다. 쇤발트 협력 디자이너는 “지금의 새로운 경험은 몇 년이 흘러서야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에 무라우어 의상 디자이너는 “난 이미 영향을 받고 있다”며 “한국 음식을 정말 사랑하는데 매일 김치를 먹어 위에서 행복한 변화가 일고 있다”며 웃었다. 그의 이야기에 다시 ‘한국 음식 애착 열전’이 시작됐다. 쇤발트는 냉모일을, 바우어는 쌀과자를 찬양했다. 연습 중엔 김금미 국립창극단원이 ‘몸보신해야 한다’며 추어탕을 사준 것이 특별한 경험이라고 뤼스케는 귀띔한다.
“음악이든 음식이든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에 기꺼이 몸을 던지며 찾아오는 긍정적 변화는 어디에서 시작돼 어디로 튈지 아무도 몰라요. 장르 속에서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는 것은 설렘과 동시에 두려움을 주지만, 경계 위에 서 있는 시간은 창작자에게 필요한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익숙한 것을 벗어나 낯선 세계를 경험하면서 우리는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 수 있고, 그 깊이만큼 관객과도 진실한 소통이 가능해진다고 믿어요.” (요나 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