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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고고학자, 도시에 묻힌 불평등을 파헤친다”

조선일보 허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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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고고학자, 도시에 묻힌 불평등을 파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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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 추상회화 대표 美작가
마크 브래드퍼드 한국 개인전
마크 브래드퍼드의 초대형 설치 작품 ‘떠오르다(Float·2019)’. 전단, 광고 포스터, 신문지 등을 긴 띠 형태로 자르고 노끈으로 이어붙여 600㎡ 규모의 전시장 도입부 바닥 전체를 덮었다. 관람객들은 그 위를 걸으며 몸으로 작품을 체험할 수 있다. /김지호 기자

마크 브래드퍼드의 초대형 설치 작품 ‘떠오르다(Float·2019)’. 전단, 광고 포스터, 신문지 등을 긴 띠 형태로 자르고 노끈으로 이어붙여 600㎡ 규모의 전시장 도입부 바닥 전체를 덮었다. 관람객들은 그 위를 걸으며 몸으로 작품을 체험할 수 있다. /김지호 기자


알록달록 거대한 추상 회화가 바닥에 깔렸다. 600㎡ 규모의 도입부에 깔린 초대형 설치 작품 ‘떠오르다(Float)’. 작가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작업실 주변 거리에서 수집한 전단지, 광고 포스터, 신문지 등을 긴 띠 형태로 자르고 노끈으로 이어 붙여 전시장 바닥 전체를 덮었다. 관람객들은 그 위를 직접 걸으며 몸으로 작품을 체험한다.

동시대 추상회화를 대표하는 미국 작가 마크 브래드퍼드(64) 개인전 ‘Mark Bradford: Keep Walking’이 서울 용산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지난 1일 개막했다. 브래드퍼드의 국내 첫 개인전이자 아시아 최대 규모 전시다. 회화, 설치, 영상 등 40여 점을 통해 20년 작업 세계를 한자리에 펼쳤다. 설치 작품 ‘떠오르다’는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가장 먼저 만나는 작품이자 이번 전시를 꿰뚫는 하이라이트. 개막을 앞두고 지난달 28일 본지와 만난 작가는 “걷는다는 행위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인내의 행위”라며 “관람객 역시 작품을 보면서 계속 움직여주길 바란다”고 했다.

LA 사우스 센트럴에서 태어난 그는 싱글맘 어머니가 운영하는 미용실을 도우며 유년기를 보냈다. 뒤늦게 미술에 입문해 미국을 대표하는 추상화가로 우뚝 섰다. 30대에 캘리포니아 예술대학교에서 석사를 마친 그는 2017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미국관 대표로 발탁됐고, 2021년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올랐다.

거리에서 수집한 전단, 포스터, 신문지 등을 겹겹이 쌓고, 긁고, 찢어내는 작업 방식을 고수한다. 이유를 묻자 그는 “나만의 고고학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콜라주로 지층을 쌓은 다음, 다시 파헤치면서 흑인, 퀴어, 도시 하층민의 삶을 발굴하는 겁니다. 실제 발굴 현장에서 쓰는 도구를 사용해요. 망치로 두드리고, 끌로 파고 붓으로 털어내죠.” 신작 작업을 위해 2주간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 호텔에 머물렀다는 그는 “레스토랑 바닥 일부를 유리로 덮어 발굴로 드러난 유적을 볼 수 있게 한 것이 흥미로웠다”고 했다.

마크 브래드퍼드, '파랑(Blue)'. 2005. 파마용 반투명 종이(엔드페이퍼)로 만든 초기작이다. 213×183cm. /아모레퍼시픽미술관

마크 브래드퍼드, '파랑(Blue)'. 2005. 파마용 반투명 종이(엔드페이퍼)로 만든 초기작이다. 213×183cm. /아모레퍼시픽미술관


마크 브래드퍼드, '공기가 다 닳아 있었다(The Air Was Worn Out)'. 2025. '기차시간표' 연작이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

마크 브래드퍼드, '공기가 다 닳아 있었다(The Air Was Worn Out)'. 2025. '기차시간표' 연작이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


그의 작업은 ‘사회적 추상’이라 불리며 동시대 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구체적인 대상을 그리지 않는 추상화이지만, 그 안에 인종과 계층, 권력과 불평등에 대한 날카로운 시각이 담겼기 때문이다. 초기작 ‘엔드페이퍼’ 연작은 유년 시절 미용실에서 흔히 접했던 반투명 파마 용지(엔드페이퍼)를 겹쳐 붙인 추상화. 기차 출발 시간과 지명을 추상으로 재구성한 ‘기차 시간표’ 연작은 20세기 초·중반, 인종차별을 피해 이주한 600만명 흑인들의 ‘대이주’를 표현했다. 8개의 불탄 지구가 각기 다른 크기로 공중에 매달린 설치 작품은 “불균형과 고립, 생태 위기가 심화되는 오늘날 지구의 현실을 반영한다”.

마크 브래드퍼드, '그는 잿더미의 왕이 되기 위해서라도 나라가 타오르는 것을 볼 것이다(He Would See This Country Burn if He Could be King of the Ashes)'. 2019. /아모레퍼시픽미술관

마크 브래드퍼드, '그는 잿더미의 왕이 되기 위해서라도 나라가 타오르는 것을 볼 것이다(He Would See This Country Burn if He Could be King of the Ashes)'. 2019. /아모레퍼시픽미술관


한국 전시를 위해 만든 신작 ‘폭풍이 몰려온다’ 앞에 선 작가 마크 브래드퍼드. /김지호 기자

한국 전시를 위해 만든 신작 ‘폭풍이 몰려온다’ 앞에 선 작가 마크 브래드퍼드. /김지호 기자


한국 전시를 위해 만든 신작 ‘폭풍이 몰려온다’는 2005년 미국 남부를 덮친 허리케인 카트리나와 미국 최초의 드래그 퀸인 윌리엄 도시 스완의 삶을 병치시킨 작품이다. 브래드퍼드는 “스완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누명을 쓰고 사회적으로 핍박받았지만 굴하지 않았던 인물”이라면서 “검은 벽지와 종이 표면을 산화시켜 만든 금빛 무늬는 폭풍의 결을 상징한다. 이 공간에 들어서면 실제 허리케인의 중심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내년 1월 25일까지. 성인 1만6000원.

마크 브래드포드, '폭풍이 몰려온다(Here Comes the Hurricane)'. 2025. 이번 한국 전시를 위해 새롭게 구상된 연작이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

마크 브래드포드, '폭풍이 몰려온다(Here Comes the Hurricane)'. 2025. 이번 한국 전시를 위해 새롭게 구상된 연작이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


[허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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