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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시각] 국제 망신 된 尹 특검 브리핑

조선일보 원선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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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시각] 국제 망신 된 尹 특검 브리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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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윤석열 전 대통령의 체포 영장 집행이 불발되자 한 외신이 이를 “한국의 윤 전 대통령, 속옷 차림으로 누워 심문 거부”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France24

지난 1일 윤석열 전 대통령의 체포 영장 집행이 불발되자 한 외신이 이를 “한국의 윤 전 대통령, 속옷 차림으로 누워 심문 거부”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France24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인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 1일 ‘김건희 특검팀’의 체포 영장 집행에 불응했다. 당시 피의자가 어떤 복장 상태였는지 특검팀은 상세히 기자들에게 알렸다. 몇 시간 지나자 주요 외신에서 ‘한국’ ‘전 대통령’과 함께 ‘속옷(underwear)’이라는 단어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러닝셔츠와 속옷만”(로이터) “속옷 색상에 관한 정보는 없다”(AFP) “새로운 저항 방법”(AP) 같은 문장의 행간에 조롱이 담겨 있었다.

친여(親與) 진영은 이런 외신 보도에 환호하며 “나라 망신”이라고 피의자를 비난했다. 일부 민주당 지지자는 인공지능(AI)으로 피의자가 벌거벗고 드러누운 사진을 만들어 돌리며 낄낄거렸다. 한 전직 검사는 유튜브에서 “다음 체포 땐 이불을 뒤집어씌워 (보쌈해) 나오자”고 했다. 지난 대선 직전 민주당에 입당한 그는 새누리당에서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고 2022년 대선 땐 윤석열 캠프에서 활동한 사람이다.

국격이 훼손됐다는 지적에 동의한다. 하지만 특검팀과 지지층이 국제 망신을 당하는 나라의 국민임을 잊은 양 이 사태를 즐기는 듯해 민망하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검찰 개혁’ 명분으로 기틀을 놓았던 ‘인권보호수사규칙’엔 피의자의 사생활을 지키게 돼 있다. 특검 브리핑은 규칙 위반 소지가 있다. 과거 검찰의 피의 사실 공표에 이를 갈던 지지층이 외신의 ‘속옷 보도’에 열광하는 모습은 낯설다.

“국민께 송구하다.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겠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7년 3월, 파면 11일 뒤 검찰에 출석하며 한 말이다. 노태우·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도 피의자 신분으로 국민 앞에 섰을 때 비슷한 말을 했다. 국민은 이후 수년간 수갑에 묶인 채 호송차에서 법정으로 압송되는 박 전 대통령의 모습을 봤다. 무더위에도 긴팔 재킷에 바지 차림이었다. 전직 국가원수로서 품위를 지키려는 마음이었다고 생각한다.

윤 전 대통령은 지난 1월 현직 대통령 신분으로 체포돼 구속되는 초유의 혼란 속에서 국민에게 송구하다는 상투적 입장조차 밝히지 않았다. 수감 중 체포 영장 집행이 ‘망신 주기’라고 생각하고 거부할 수는 있다. 하지만 전직 대통령이 일개 국민이자 피의자로서의 권리를 선택하는 순간, 더 무거운 책임은 포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치욕은 같은 길을 걸은 전임자들이 나라의 체면을 위해 감내한 역사이기도 했다.

계엄 사태 이후 한국 정치를 보도하는 서구 언론의 태도엔 알게 모르게 우월감이 깔려 있었다. “급속한 경제·문화적 성과에도 제도권에 뿌리박힌 권위주의”(가디언) “냉전적 분열의 뿌리는 군사정권”(월스트리트저널)…. 한국 경제·문화가 아무리 전성기를 달려도 그 토대인 민주주의만큼은 ‘아시아답게 열등’하기를 바라는 욕망처럼 읽혔다.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특검팀은 법률과 절차에 따른 품격 있는 언어로 대한민국이 민주 문명 국가임을 보여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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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선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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