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하회에 '한옥호텔' 짓는 안영환
2년전 직접 한옥학교 열고 인력 양성
미국서 시스템 엔지니어로 일하다
91년 아버지와 부동산 일하려 귀국
마포 헌집 헐다가 한옥의 美와 조우
진심 믿고 땀 흘리는 '문화 의병'
문갑식 선임기자 |
낙동강변 하회(河回)마을에 봄빛이 완연하다. 화사한 꽃 대궐 속 뚝딱대는 소리는 약동의 소음이다. 여기 건설되고 있는 열두 채 한옥은 일(一)자, 기역(ㄱ)자, 디귿(ㄷ)자, 미음(ㅁ)자형이다. 전통 양식 그대로다.
내년 6월 문 여는 한옥군(群)은 하회마을, 도산서원 같은 명물이 될 것이다. 외국 관광객들이 일본 료칸(旅館)처럼 우리의 그윽한 멋을 느낄 것이다. 잿빛 콘크리트 건물에 지친 도시인에겐 한줄기 청량제가 될 것이다.
안영환(安永桓·56)이 한국정신문화의 본향(本鄕)이라는 땅에, 다름 아닌 한옥을 짓는 이유가 있다. "한옥 마을은 전주(全州), '선비의 고장'이란 말은 경북 영주(榮州)가 가져갔단 말인데,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안영환은 한옥 호텔을 지으려 2년 전부터 준비해왔다. 자비로 한옥 학교라는 대목(大木) 양성 과정을 만든 것이다. 6개월간 아침 7시 반부터 10시간 동안 목수 일을 익힌 이들 중 상당수가 한옥 호텔 지으며 땀 흘리고 있다.
이것이 그의 지갑을 두둑하게 만들어주는 것일까? 안영환이 말했다. "2003년에 경기도 신갈에 몽인각(夢人閣)을 지었습니다. 고깃집인데 당시 목표는 하나였어요. 한옥 면적 활용을 극대화하자는 것. 시도는 성공했지만 장사는 안돼요. 외딴곳에 있기 때문에, 하하."
한옥 학교도 마찬가지다. "왜곡된 한옥 건축 단가를 바로잡으려 인력을 양성한 겁니다. 개인이 하긴 버겁죠. 그래도 계속할 겁니다." 그렇다면 한옥 호텔은? 그 말이 이 '돈키호테' 같은 사나이의 가슴에 불을 붙였다.
"호텔은 장작으로 구들을 데우는 방식입니다. 세계 최초죠. 유명 휴양지의 풀 빌라도 만듭니다. 스파하며 낙동강을 즐기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고요? 맨땅에 헤딩하며 하회에서 낮술을 즐긴다는 뜻이죠."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
그의 호는 몽중(夢中)이다. '꿈속에 있다'는 말처럼 인생 전사(前史)는 좌절의 연속이다. 서울교대부국 나와 경복중을 지망했으나 '뺑뺑이 1세대'가 되는 통에 무산, 훗날 경복고에 지망했지만 두 번 다 낙방했다.
대광고에선 종교 문제로 대들다 흠씬 얻어맞고 성적이 급전직하, 고3 때 마음잡고 서울대에 응시했으나 낙방, 겨우 힘내 외대 이란어과 전액 장학생이 됐는데 호메이니 혁명 때문에 헛물만 켜게 됐다.
지금 아내를 만나 미국 간 그는 컴퓨터공학을 배워 1985년부터 91년까지 시스템 엔지니어로 일하며 팔자(八字)를 일신하는 듯했으나 아버지가 "함께 부동산 하자"며 귀국을 종용하는 통에 여전히 꿈속을 헤맨다.
운명은 인간을 돌리다 제자리 찾게 한다고 했던가, 한옥과의 조우(遭遇)가 이때 시작된다. 마포구 대흥동에 한옥 가진 이가 헐고 빌라를 짓는 게 어떻겠냐며 조언을 요청했는데 토초세(土超稅)만 무는 애물단지였다.
"그냥 수리해서 한정식집을 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했더니 그이가 대뜸 이러는 것이었다. "난 자신 없으니 당신이 해보쇼!" 뭐에 씌었는지 그냥 맡아 수리를 시작했다. 천장 뜯고 시멘트 덮인 것 뜯는 순간이었다.
"아! 그때 숨어있던 한옥의 선(線)이 살아나는 겁니다. 정말 그 모습이란…. 알고 보니 그 집이 보통 집이 아니었습니다. 마포 황 부자 아시죠? 그가 살던 집이었어요. 상량문(上梁文)엔 광서 6년이란 글귀도 보이고."
이곳이 얼마 뒤 재개발로 사라질 마포 진사댁(進士宅)이다. 그 뒤 한옥에 미친 사내는 명동파출소 옆 좁은 골목에 한옥 처마를 올리더니 마침내 안동 풍천면 하회리 해발 64m 부용정 맞은편에 초가 네 채를 세운다.
그런가 하면 종로구 계동 뒷골목 들어서면 한옥 한 채가 반긴다. 대금(大琴) 가락 들으며 대문을 들어서면 방 네 칸에 정자(亭子) 하나, 거북이 등껍질을 한 소나무가 한복판에 굽은 200평 공간이 청아하기 그지없다.
'옛것을 즐긴다'는 '낙고재(樂古齋)'라는 옥호를 지닌 이 터의 주인은 사학자 이병도(李丙燾)였다. 거기서 문일평, 최현배 같은 선비들이 일제에 맞서 '한국학'을 지키려 했다. 1934년 발족한 진단학회(震檀學會)다.
그 집에 줄 선 외국인을 보며 주인이 큰소리친다. "하룻밤에 수십만원을 지불합니다. 한옥이 이렇다니까요. 한옥 보면 가슴이 짜릿해지지요. 온돌에 누우면 '시원하다'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우리 문화 유전자지요."
이런 안영환의 노력이 통했음인지 안동시가 얼마 전부터 한옥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김치 세계화'가 관권(官權) 개입으로 갈 길을 잃은 것과 대조적이다. 역시 우릴 살려온 것은 '문화 의병(義兵)'들이다.
곧 봄추위가 가고 땡볕이 하회마을에 내리쬘 것이다. 그때 안영환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한다. "진심은 반드시 통해요. 제 열정이 세계를 움직이는 날이 곧 올 것이라는 동지(同志)들의 말, 그것을 믿고 저는 오늘도 처마와 들보에 매달립니다."
[문갑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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