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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고관절 수술 딛고 우승… 머리의 라켓, 포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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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머리, 대수술 2번 받고도 31개월만에 男테니스 단식 우승

끈질긴 집념으로 재활 훈련 "가족의 힘으로 지금까지 버텨"

준우승 바브린카 "패배 아쉽지만 머리가 건강하게 돌아와서 기뻐"

20일(한국 시각) 벨기에 앤트워프 로토 아레나. 남자프로테니스(ATP) 투어 유러피언 오픈 단식 결승전이 열린 센터 코트에 앤디 머리(32·영국·세계127위)가 등장하자 관중들이 일어나 박수쳤다. 지난 1월 엉덩뼈에 금속 관절을 박는 대수술을 하고 돌아온 선수에 대한 경의였다. 우승까지 기대하진 않았다. 머리의 상대는 메이저 3회 챔피언 스탄 바브린카(34·스위스·17위). 바브린카도 부상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적어도 엉덩이는 멀쩡했다. 움직임이 생명인 테니스에서 고관절 수술을 받고 단식 우승컵을 차지한 선수는 한 명도 없다.

앤디 머리는 포기를 모른다

하지만 머리가 이겼다. 2대1(3-6 6-4 6-4) 역전승. 머리는 1세트를 내줬고 2세트 중반 1―4로 밀리며 패색이 짙었는데, 악착같은 리턴으로 4―4 동점을 만들더니 기어이 2세트를 가져갔다. '끝났다' 싶은 공도 쫓아가 받아넘겼고, 손을 못 쓰면 입으로 예술하는 구족화가처럼 정교한 서브와 패싱샷으로 상대를 물고 늘어졌다. 머리의 끈질김에 질려버린 바브린카는 3세트에서 범실을 남발하며 무너졌다. 2시간 27분 접전 끝에 바브린카가 친 포핸드가 라인 밖으로 훌쩍 날아가자 머리는 수건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31개월 만에 맛본 단식 우승이었다.

조선일보

부활 스매시 - 앤디 머리(영국)가 20일(현지 시각) ATP 투어 유러피언 오픈 단식 결승에서 스타니슬라스 바브린카(스위스)를 상대하는 모습. 올해 1월 선수 생활에 치명적인 고관절 수술을 받아 은퇴설까지 나왔던 머리는 이날 바브린카에게 역전승을 거두며 부활을 알렸다. /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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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는 "금속은 통증을 모른다. 이젠 경기에 져서 마음 아플 순 있어도 엉덩이 아플 일은 없다"고 농담하면서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엄청난 의미가 있는 우승"이라고 감격했다. 패자 바브린카도 "패배는 아쉽지만 머리가 다시 건강하게 돌아와서 기쁘다"고 축하했다.

머리의 엉덩뼈는 2년 전 여름 이상 신호를 보냈다. 큰 체구(키 191㎝, 체중 82㎏)로 줄창 뛰면서 테니스를 친 대가였다. 그의 관절은 그랜드슬램 우승을 10회 넘게 한 '빅3' 로저 페더러(38·스위스)와 라파엘 나달(33·스페인), 노바크 조코비치(32·세르비아)를 이겨보려고 악쓰다 닳았다. 주치의는 수술하면 선수 생활이 어렵다고 했다. 그는 대회를 기권하고 각종 요법을 시도하면서 수술만은 피하려고 20개월을 몸부림쳤지만 결국 인공관절 치환 수술을 선택했다. 아침에 눈 떠서 잠들 때까지 고통 없이 지내고, 몸을 숙여 양말을 신을 수 있으며 두 딸과 놀아주는 일상을 위해서.

가족의 사랑이 만든 우승

재활은 봄부터 돌입했다. 윔블던 2회, US오픈 1회 우승에 올림픽 2회 연속(2012·2016년) 금메달로 영국 왕실에서 기사 작위까지 받은 테니스 스타 머리의 수술 후 목표는 간단했다. 다시 '테니스 선수'가 되는 것. "세 살부터 테니스를 쳤는데 테니스 없는 삶을 살려니 두렵다"고 BBC 칼럼에서 토로했던 그는 지난 6월 복식 대회에 나가 깜짝 우승을 차지하더니 8월 신시내티 마스터스부터 단식에도 출전했다. 20대 랭킹 상위권 선수들과 대등한 경기를 하며 자신감을 찾은 그는 7번째 단식 참가였던 이번 유러피언오픈에서 결국 우승까지 해내며 테니스 인생 2막의 전개를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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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격의 눈물 - 앤디 머리는 우승을 확정 지은 뒤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다. /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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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엉덩뼈는 눈물만큼 기쁨도 줬다. 머리는 이달 말 아내의 셋째 출산을 기다린다. 재활 기간에 얻은 생명이다. 그는 "투어를 떠나 있을수록 가족이 더 늘어난다"며 "아이들이 셋이나 되면 집안이 통제 불능이 될 것 같다. 투어를 더 열심히 다녀야겠다"는 농담으로 가족과 테니스에 대한 사랑을 밝혔다.

"포기하고 싶던 순간이 수없이 많았지만 그때마다 아내는 변함없이 무한한 긍정과 지지를 보내줬습니다. 저는 아주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이 우승 트로피는 아내의 것입니다."

[양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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