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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 (일)

[신무광의 일본통신]동아시안컵에서 북한팀이 응원을 받은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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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지난 12일 도쿄 아지노모토 경기장에서 열린 동아시안컵 남자부 한국과 북한의 경기에서 북한 응원단의 모습. 제공 | 대한축구협회



[스포츠서울 칼럼니스트] 일본은 매년 12월이 되면 그 해의 세태를 나타내는 ‘올해의 한자’를 발표한다. ‘일본한자능력검정협회’가 전국적으로 모집해 교토의 명소인 기요미즈데라의 주지스님이 그 한자를 써 보이는 것이 관례다. 이 한자는 방송이나 신문에서 크게 다룰 정도로 화제가 되곤 하는데 제3차 아베 내각이 출범한 2015년은 ‘安(안)’, 일본이 리우 올림픽에서 메달을 쏟아냈던 지난해에는 ‘金(금)’이었다. 그리고 지난 12일에 발표된 올해의 한자는 바로 ‘北(북)’이다.

‘규슈 북부 호우 피해’, ‘홋카이도 니혼햄의 오타니 쇼헤이의 메이저리그 진출’, ‘경마 키타산 블랙의 활약’ 등 다양한 이유가 있다고는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북한(일본에서는 북조선)’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김정남 암살, 핵실험 강행, 잇따른 탄도 미사일 발사 등 ‘북의 위협’이 일년 내내 화제가 됐기 때문이다. 북한에 대한 일본의 이미지는 ‘베일에 싸여 섬뜩하고 횡포를 부리는 방약무인한 독재국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최근 일본의 젊은이들 중에는 북한과 한국이 같은 민족이며 같은 한국어를 쓴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도 있을 정도다.

그렇게 ‘올해의 한자’가 발표됐을 무렵 무슨 우연인지 북한 사람들이 일본에 찾아왔다. 그들은 바다를 표류해 일본 해안에 도착한 목조 어선 승무원들이 아니라 베이징을 경유하는 항로를 통해 입국한 축구 선수들이었다. 8일부터 일본에서 열린 동아시아 축구연맹(EAFF) E-1챔피언십에 출장하기 위해 북한 남녀 선수들이 방일한 것이다. 알려진대로 일본 정부는 납치문제나 핵미사일 개발 등을 추진 중인 북한에 대해 독자적인 제재 조치로 북한 국적자의 입국을 원칙적으로 금지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국제 스포츠 대회라는 점을 고려해 일본 정부도 특별히 입국을 허용했다. 지금까지 2005년과 2011년에 월드컵 아시아 예선을 위해 남자 선수들이 방일한 적이 있지만 여자는 2010년 동아시아 대회 당시 납치문제를 담당한 나카이 히로시 장관의 ‘입국을 불허한다’는 발언에 반발해 대회 일주일 전에 불참을 선언했던 적도 있다. 북한 축구 관계자에 따르면 축구 남녀 대표가 나란히 방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그래서였는지 경기장은 물론 연습장에도 일본 언론의 기자와 카메라맨이 대기할 정도로 북한은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북한 선수들이 서비스 정신을 가지고 미디어에 대응한 것은 아니었다. 공동취재구역에서 취재에 응한 것은 등번호 16번 리영직, 10번 안병준, 7번 김성기 정도였다. 그들은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재일교포 J리거로 한국에서 유명한 정대세나 안영학의 후배이기도 하다. 이번 대회에서는 한국이나 중국보다 많은 인원수를 자랑했던 북한 응원단이 그런 재일교포 J리거를 향해 뜨거운 성원을 보냈다. 도쿄 근교에는 도쿄 조선중고급학교, 가나가와 조선중고급학교, 조선대학교 등 조선총련계의 민족학교가 몇 군데 있는데 그곳 학생이나 학부모들이 바로 북한 응원단의 주류다. 그중에는 버스로 10시간 이상 달려 경기장에 찾아온 오사카 조선중고급학교 축구부 학생들도 있다고 해 그 열정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재일 한국인으로서 잠깐 그들을 대변하자면 사상적으로 기울었다던가, 북의 정치체제를 열렬히 지지해서 북한을 응원하는 건 아니다. 요즘 조선학교 학생들은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타국이 북한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빨간 유니폼을 입고 북한 대표를 응원하는 것은 경기장에서 싸우는 선수들이 어린 시절부터 배워온 ‘조국’의 선수들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사상이나 정치 문제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요즘 젊은 세대 중에는 ‘정체성의 위기’때문에 고민하는 이가 많다고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에서는 북한을 비판하는 보도가 홍수처럼 쏟아진다. 그런 보도를 볼 때마다 ‘조선인’으로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고 싶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어쩌면 이번 E-1선수권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할 기회였는지도 모르겠다. 기자석에서 그들이 한결같이 연호하며 외치는 ‘필승 조선!’이란 구호를 들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피치 커뮤니케이션 대표(번역:이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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