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7 (토)

공포영화보다 무서운 워킹맘의 일상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영국 드라마 <더 리플레이스먼트>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영국 드라마 <더 리플레이스먼트>

젊고 유능한 건축설계사 엘런(모번 크리스티)의 앞길은 창창하다. 회사가 오랫동안 공들여온 대규모 도서관 신축 계약을 성사시킨 공로로 연봉 인상과 승진도 약속받았다. 하지만 도서관 공사가 막 시작되려는 중요한 순간에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다. 아이도, 공사도 포기할 수 없는 엘렌은 출산 3개월 뒤에 복귀하겠다고 자신하나 육아휴직이 점점 다가오면서 불안감에 휩싸인다. 설상가상으로 후임 폴라(비키 매클루어)가 엘렌 못지않은 유능함과 무서운 적응력으로 그녀의 빈자리를 빠르게 메우면서 위기감은 더욱 증폭된다.

여성의 불안한 사회적 조건은 그 자체로 스릴러가 되기도 한다. 지난해 개봉한 스릴러 영화 <미씽: 사라진 여자>만 해도 이혼 뒤 육아와 생계를 혼자 감당하느라 전전긍긍하는 워킹맘 주인공의 하루하루가 본격 범죄 플롯보다 훨씬 공포스러웠다. 육아휴직을 앞둔 건축설계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비비시>(BBC) 미니시리즈 <더 리플레이스먼트>도 마찬가지다. 의문의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비밀스러운 과거를 지닌 용의자가 존재하는 범죄스릴러지만 진짜 공포는 모성 강요, 경력 단절 등 여성을 옭아매는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발생한다.

드라마는 ‘단지 아이가 생겼을 뿐인데’ 급작스럽게 변화하는 엘런의 주변 상황과 심리에 초점을 맞춘다. ‘누구도 당신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며 찬사를 보냈던 회사는 예전과 다름없이 일에 헌신하는 임신부 직원을 부담스러워하고, 사랑스럽고 배려심 많았던 남편도 뱃속의 아이를 걱정하며 은근히 모성의 의무를 환기시킨다. 후임 폴라와의 갈등은 더욱 심각하다. 처음에는 출산과 육아로 10년간 일을 쉬었다는 폴라에게 공감과 호감을 느꼈던 엘런의 감정은 곧 경계와 증오로 바뀐다. 폴라가 도발적이고 영악한 행동으로 동료들과 고객의 환심을 살 뿐만 아니라 수시로 ‘엄마의 덕목’을 강조하며 엘런을 자극해왔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주변인들은 엘런의 복합적인 감정을 질투와 임신 히스테리로 치부한다. 여성의 사회적 불안은 그렇게 개인의 문제로 축소되고 무시당한다.

한겨레

김선영


사실 국내 시청자의 입장에서 <더 리플레이스먼트>의 진정한 공포는 따로 있다. 엘런이 싸우는 상대는 적어도 제도는 아니다. 그녀는 육아휴직을 비롯한 여러 제도적 보호 장치를 넘어선 뿌리 깊은 여성혐오와 싸운다. 기본적 제도조차도 미비한 이곳의 현실을 떠올리면 한 차원 진화된 고민이다. 결국 <더 리플레이스먼트>가 묘사하는 공포는 그 사회의 유리천장 지수와 비례한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매해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해 발표하는 유리천장 지수에서 부동의 최하위권을 기록 중인 국내에서는 이미 많은 여성들이 호러가 일상인 현실을 살고 있다. 최근 한 대선 후보의 보육정책에 대한 실언이 불러일으킨 분노와 그 반대편에서 ‘슈퍼우먼방지법’을 공약 1호로 내건 대선 후보에 대한 호평은 모두 그 공포의 또 다른 얼굴일 것이다.

김선영 티브이 평론가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 [주주신청]
[▶ 대선 팩트체크] [페이스북] [카카오톡] [정치BAR]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