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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한낮의 여름, 구름과 정원과 책들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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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한낮의 여름, 구름과 정원과 책들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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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폭염 쪽방촌 고통 떠올린 하루



학술서 대신 여백 풍성한 책 뒤적이다



흩뿌린 빗줄기에서 피어오른 흙내음



여름 정원의 짙은 풍경 속에 가만히 앉았다. 그림은 호아킨 소로야의 ‘정원에서의 낮잠’(1904). 위키미디어 코먼스

여름 정원의 짙은 풍경 속에 가만히 앉았다. 그림은 호아킨 소로야의 ‘정원에서의 낮잠’(1904). 위키미디어 코먼스






배정한의 공간이 전하는 말





무더위나 찜통더위 같은 표현으로는 전달되지 않는 극한의 폭염. 연구실에 처박혀 이 책 저 책 뒤적이는 게 최선이다. 아침부터 숨이 턱턱 막힌 오늘 오전에 펼친 책은 탁장한의 ‘서울의 심연’(필요한책, 2024). ‘어느 청년 연구자의 빈곤의 도시 표류기’라는 부제 그대로, 저자는 서울시 용산구 동자동의 쪽방촌에서 두번의 여름을 포함한 다섯 계절 동안 거주하며 빈곤한 공간과 처참한 삶의 속살을 촘촘히 관찰한다. 누구나 아는 것 같지만 아무도 제대로 모르는 가난과 혼돈의 공간 생태계를 생생히 담은 기록이라, 오히려 끝까지 읽어내기 어려웠다. 버림받은 땅의 무더위, 냄새, 소음이 책에서 진동한다. 그들은 이 잔혹한 여름을 또 어떻게 견뎌내야 하는가.



책을 덮고 연구실을 벗어나기로 했다. 마침 반납할 책들이 있다. 도서관에 들렀다가 점심 대신 팥빙수를 먹고 돌아온다는 야무진 계획을 세우고 방을 나섰다. 하지만 책 스무권을 짊어지고 불벼락 뙤약볕을 통과하면 정신까지 녹아내릴 것임을 몇 발짝 내딛지 않고 직감했다. 연구실로 퇴각하는 게 현명한 선택. 쪽방촌의 고통스러운 여름을 읽은 뒤라 나만의 작은 공간이 있다는 게, 언제나 나를 환대하는 내 자리가 있다는 게 새삼 감사하다. 책상 위 서류 뭉치들을 정리하고 쌓아둔 책들을 책장에 꽂았다. 몇달 묵은 먼지를 닦고, 심지어 바닥을 쓸었다. 블라인드를 걷어 올리니 “대지와 바다의 딸이며 하늘의 젖먹이”(퍼시 비시 셸리)인 구름이 한낮의 불볕더위를 비웃듯 푸르른 창공에 피어올랐다.



한낮의 여름. 멍하게 구름을 바라보면 여유가 찾아들고 상상력이 풀려나온다. 배정한 제공

한낮의 여름. 멍하게 구름을 바라보면 여유가 찾아들고 상상력이 풀려나온다. 배정한 제공


너무 한낮의 여름. 멍하게 구름을 바라보면 여유가 찾아든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구름을 한껏 감상할 수 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 상상력이 풀려나온다. 구름에서 동물 모양을 찾으며 놀던 어릴 적 기억. 시간이 남아돌아서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었다. 나는 책상 한편에 ‘구름감상협회’ 설립자 개빈 프레터피니의 ‘구름 관찰자를 위한 가이드’(김영사, 2023)를 늘 올려놓는다. 사진과 그림이 가득한 ‘날마다 구름 한 점’(김영사, 2021)도 함께. 구름을 보다가 구름 책을 펼치는 건 재미없다. 책장을 먼저 넘기다 보면 시선이 저절로 창밖 하늘로 옮겨가게 된다. 대상의 이름을 정확히 부르는 게 관계 맺기의 시작이다. 구름의 올바른 이름을 알면 구름 감상의 즐거움이 확장된다.



브로콜리처럼 폭신한 뭉게구름 덕분에 마음이 포근해졌다. 여름마다 단골로 찾는 책, 화가이자 작가인 우지현의 ‘풍덩!’(위즈덤하우스, 2021)을 꺼냈다. 저자는 “과연 어떻게 쉬어야 하는 것일까” 묻고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그 답은 물이었던 것 같다. 나는 물에 기대 쉬었다.” 수영과 휴식을 넘나드는 책에는 피카소의 ‘수영하는 사람’부터 호크니의 ‘더 큰 풍덩’까지 여러 시대의 수영 그림이 빼곡하다. 나의 버킷 리스트 중 하나는 작은 정원에 맞붙은 서재에서 마감 하루 전날 칼럼을 마무리한 뒤 집에 딸린 수영장에서 맥주 한병 비우고 배영을 즐기는 거다. 이번 생엔 이루기 힘든 로망이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풍덩!’을 아무 데나 펼쳐 읽으면 된다.



그림으로 수영을 즐기니 마음이 시원해졌다. 이럴 때 무겁고 딱딱한 학술서를 읽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여백과 그림이 풍성한 아름다운 책,먼 산의 기억’(민음사, 2024)을 골랐다. 놀랍게도 이 책은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무크의 그림일기다. 화가를 꿈꿨고 건축을 공부했던 파무크는 22살에 자신 안의 화가를 죽이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56살에 다시 붓을 든 그는 14년 동안 매일 일상의 관찰과 생각을 몰스킨 노트에 담았다. 수천쪽의 일기를 한권에 모은 ‘먼 산의 기억’에는 쪽마다 두터운 질감의 풍경화가 등장한다. “모든 것의 시작은 풍경이다.” 그림들 사이사이에 적은 메모를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 “바람에 바스락거리는 나뭇가지와 나뭇잎 사이로 단어들과 글자들이 나타날 거라고 생각하며 한참을 기다렸다.”



습한 공기와 무더운 바람에 ‘조각보 정원’ 풀꽃들의 키가 훌쩍 자랐다. 배정한 제공

습한 공기와 무더운 바람에 ‘조각보 정원’ 풀꽃들의 키가 훌쩍 자랐다. 배정한 제공


창밖 구름의 높이가 낮아지고 흘러가는 속도가 빨라졌다. 폭염의 열기가 조금은 식었을까. 건물 한구석에 숨겨진 ‘조각보 정원’에 나갔다. 우리 학과 설립 50년을 맞아 최영준 교수와 학생들이 디자인하고 정성껏 만든 뜰이다. 습한 공기와 더운 바람에 수크령, 절굿대, 향등골, 쥐오줌, 가우라, 꽃그령, 파니쿰 같은 다년생 풀꽃들의 키가 훌쩍 자랐다.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여름 정원의 짙은 풀밭에 가만히 앉았다. 순식간에 흘러내린 땀이 벤치까지 적신다. 흐드러지게 핀 수국의 꽃이 무게를 못 견뎌 출렁이는 것 외엔 모든 게 정지된 풍경. 그러나 폭염 속에서도 이 작은 우주는 조용히 생동한다. “햇빛은 전방위로 쏟아졌다 그리고 적막이/ 찾아왔다가 토끼풀 위로 기는/ 개미 한 마리와 함께 사라졌다/ 잠자리 두 마리가 교미하며 날았다/ 어린 메뚜기 세 마리가/ 차례로 뛰었다 사마귀 한 마리가 잔디밭/ 구석의 돌 위로 기어올랐다”(오규원의 시, ‘뜰의 호흡’ 중에서).



정원에 앉아 정원을 읽어보자고 챙겨 간 ‘정원의 책’(한겨레출판, 2025)을 펼쳤다. 조경역사학자 황주영이 지은 이 책은 정원과 문학이라는 두 세계를 가로지르며 정원의 희망과 상실, 그 기쁨과 그리움을 길어 올린다. 여러 문학 작품에서 배경으로, 주제로, 때로는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정원들의 숨은 의미를 찾아 펼친다. 그 어느 정원보다 정성스레 가꾼 ‘글의 정원’이다.




글의 정원 속을 걷다가 크리스티앙 보뱅을 다룬 장에 이르렀다. “그 정원의 이름은 그리움이다”라는 문장을 소리 내어 읽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소리가 평소와 다르다. 비의 소리는 비가 만나는 지면의 성질에 따라 달라진다. 단단한 아스팔트에 쏟아지는 거친 빗소리만 기억하는 내 귀에 흙과 풀에 떨어지는 아늑한 빗소리가 방문했다. 무덥고 긴 여름날이 저물고 있었다.



배정한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공원의 위로’ 저자



* 환경미학자이자 조경비평가인 배정한이 일상의 도시, 공간, 장소, 풍경에 얽힌 이야기를 전한다.









배정한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

배정한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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