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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총 4조 달러 엔비디아에 '보스'가 없다고? [ER트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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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총 4조 달러 엔비디아에 '보스'가 없다고? [ER트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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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태영 기자]


우리는 지금, 문명사적 대변혁기를 맞고 있다. 갑작스레 닷컴 시대가 저물고 AI 시대가 열렸다. 닷컴 시대의 난공불락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구글이 연일 휘청인다. 무명이던 엔비디아는 파죽지세로 빅테크들을 꺾고 왕좌에 올라 AI 시대의 첫 패자(覇者)가 되었다.

엔비디아는 시총 4조 달러 대를 유지하고 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1602년 설립) 이래 420여 년 증시 역사에서 단연 최고 기록이다. AI를 학습·구동시키려면 GPU(그래픽처리장치)가 들어간 고성능 AI 반도체가 필요한데, 엔비디아 GPU의 글로벌 마켓 점유율이 무려 80%다. 이 때문에 AI 시대 엔비디아의 패권은 장기간 지속될 것이란 전망이다.

세인의 관심은 창업자이자 CEO 젠슨 황에게만 쏠려 있다. 엔비디아의 조직 문화에 관해선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 실마리를 지난 6월 1268호 ER 이코노믹리뷰의 [북앤북] 코너에서 소개한 책 <엔비디아, 세계 최강 반도체 기업이 만드는 2040 AI 세계>를 비롯해 해외 매체 보도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요약하면, 엔비디아에는 조직을 움직이는 '보스'가 없다. 대신, 방향에 '합의'한 구성원들이 조직을 움직인다. AI가 분석은 해줄 수 있어도, 조직을 움직이는 판단과 동의는 결국 사람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AI 시대의 승자 엔비디아는 '누가 조직에 명령했는가'보다 '조직이 방향에 합의했는가'라는 새로운 조직문화 트렌드를 제시한다.

◇ 경영진·엔지니어, '리바128 불량' 함께 수작업 해결

1993년 창업한 엔비디아는 첫 제품 NV1의 실패로 파산 위기에 몰렸다가 1997년 그래픽 칩 리바128(RIVA128) 개발로 기사회생했다. 리바128은 2D와 3D 기능을 통합한 혁신적 GPU로 주목받았다.


그런데, 이 리바128을 부품으로 사용하는 대만 기업의 제품 불량률이 30%나 됐다. 보통의 제품 불량률은 5% 미만이다. 엔비디아의 엔지니어들은 리바128의 설계상 결함은 없다고 확신했다. 그렇다고 해서, 고객사에 리바128을 그대로 납품할 수는 없었다. 그때 공동창업자이자 하드웨어 엔지니어링 담당 부사장 크리스 말라초스키가 제안했다. "수작업으로 리바128칩을 전량 테스트한 다음에 출하합시다."


그날부터 젠슨 황 CEO를 비롯한 전 임직원이 수십만 개의 GPU칩을 하나씩 PC에 얹어 테스트한 뒤 다시 빼내어 출하하는 단순하고 지루한 수작업에 들어갔다. 당시 젠슨 황은 "이 작업을 하지 않으면 회사를 살릴 수 없어"라고 중얼거리며 작업을 했다고 한다. 칩 하나당 5분씩 총 수천 시간 동안 경영진과 직원들이 똘똘 뭉쳐 해낸 검수작업은 고객사를 감동시켰고, 훗날 회사의 전설로 회자되었다.

모두가 합심해서 수행한 검수작업은 엔비디아의 기업문화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를 계기로 경영진과 직원들 간의 관계가 수평적이고 대등해졌다. 이후 엔비디아는 수평적 조직문화를 중요하게 여기게 됐다. 3만 명의 직원을 거느린 기업으로 성장한 지금도 변함없다고 한다.


◇ 실패 책임은 개인 아닌 팀 전체가 진다

젠슨 황은 말한다. "우리 회사에는 보스가 없다. 프로젝트가 우리의 보스다." 엔비디아에서는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책임을 갖고 업무에 임하며 꽤 많은 재량권을 부여받는다. 재량권을 주는 것과 책임을 지우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엔비디아에서는 책임은 어떻게 지게 할까? 어떤 프로젝트의 결과가 좋지 않았다고 해도 그것은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팀 전체의 문제라고 인식한다. 그렇기에 책임은 팀 전체가 함께 진다.

엔비디아에는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일한다. 따라서 개개인의 생각과 의견도 천차만별이지만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문화가 있다. 바로 다양성이다. 엔비디아에서는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의견이 다르기에 모든 것에 찬성(agreement)하기는 불가능하지만, 최종적으로는 회사의 방향에 합의(alignment)한다.


매년 두 차례 전 세계에서 리더십팀이 모여 전략을 논의할 때마다 젠슨 황 CEO는 'agreement가 아니라 alignment할 것'을 주문한다. 2013년 엔비디아가 AI에 크게 투자하기로 결정했을 때가 바로 직원들이 전략에 '합의'한 시점이었다. 당시 직원들은 '우리만의 기술로 사회의 관계를 해결한다'라는 이념을 바탕으로, 새롭게 수립된 전략인 AI 주력화를 받아들여 각 조직 단위에서 프로젝트를 실행하기로 했다. 보스의 지시가 아니라 프로젝트에 대한 '합의'를 통해 전 직원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 파워포인트 대신 화이트보드

엔비디아에는 '톱5'라는 명칭의 이메일 보고가 있다. 전 직원이 1~2주에 한 번 '톱5' 이메일을 써야 한다. 자신이 작업하고 있는 상위 5가지 사항과 최근 시장에서 관찰한 사항들을 설명하는 이메일이다. 메일에는 키워드 검색이 가능하도록 주제 태그를 달아야 한다. 메일의 수신자는 소속팀과 직속 임원이며, 젠슨 황이 모든 메일의 '참조'에 포함된다.

1대1 회의는 드물다. 보고와 피드백은 60명 넘게 모인 대규모 회의에서 이뤄진다. 이를 통해 정보가 빠르고 정확하게 공유되어 조직 간 협조가 수월해진다.

엔비디아 사무실과 회의실에는 화이트보드가 있다. 화이트보드가 파워포인트를 대신한다. 텅 빈 화이트보드를 마커펜으로 채워 나가려면 내용을 숙지하고 나름의 논리가 서 있어야 한다. 젠슨 황은 화이트보드 문화에 관해 이렇게 피력한 바 있다. "우리는 매일 새로운 도전 앞에 서 있다. 화이트보드는 그 도전을 해결하는 우리만의 방식이다."

엔비디아의 사원번호는 일련번호 순서대로 발급된다. 사원 번호가 낮을수록 더 오래 근무한 것이다. 엔비디아는 타 기업에 대해 결속력이 강하다고 한다. 장기 근속자들도 많다. 이직률은 3% 미만으로 업계 평균(약 18%)에 비해 매우 낮다. 젠슨 황은 '지적 정직성(Intellectual Honesty)'을 강조한다. 지적 정직성이란 진실을 추구하고, 실수에서 배우고, 배운 것을 공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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