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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비너스'에 반한 화학자 … 色을 파헤치다

매일경제 정주원 기자(jnwn@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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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비너스'에 반한 화학자 … 色을 파헤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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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반한 이브 클랭의 '푸른 비너스'.
Galerie Leu홈페이지

저자가 반한 이브 클랭의 '푸른 비너스'. Galerie Leu홈페이지


미술관을 거닐며 보게 되는 작품 옆 작은 이름표에 꼭 들어가는 정보가 몇 가지 있다. 작품 제목, 제작 연도, 작가 이름, 그리고 작품에 쓰인 주요 재료다. 재료는 캔버스 위의 짙은 파란색, 매끄럽거나 거친 표면 등 색과 질감을 결정짓는다. 그 자체로 관객의 시선을 잡아챌 수 있는 중요한 요소다.

미술 작가들이 섬세한 표현과 기법을 발전시키는 한편 자신에게 딱 맞는 재료에 집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재료는 작가의 의도를 농축한 하나의 감각이자 언어다.

예컨대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는 '울트라마린'(군청색)이라는 당대 가장 비싼 푸른빛 안료에 집착했다. 이 안료를 쓰려고 빚을 졌을 정도다. 지금은 아주 유명해진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속 푸른 두건, '우유 따르는 여인'의 푸른빛 치마도 이 재료를 썼다. 르네상스 화가인 알브레히트 뒤러는 울트라마린 1온스(약 28g)를 사기 위해 자기 작품을 팔았다고도 전해진다.

일상의 모든 순간이 화학으로 빛난다면
데보라 가르시아 베요 지음, 강민지 옮김
미래의창 펴냄, 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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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재료과학 연구에 뛰어든 것도 울트라마린 덕분이었다. 지금은 화학 박사이자 작가로 활동하며 스페인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에서 재료과학을 가르치기도 하는데, 그 시작은 2006년 한 전시에서 보게 된 프랑스 작가 이브 클랭의 'S41'이란 작품이었다.

1962년 만들어진 이 석고상은 짙은 파란색 여성 토르소로, '푸른 비너스'라고도 불린다.

이브 클랭은 1960년 자신만의 울트라마린인 '인터내셔널 클라인 블루(IKB)'를 상표로 등록했다. 원료가 가진 불투명하고 강렬한 느낌이 물감이 마른 후에도 유지되도록 화학자들에게 부탁해 새로운 물감을 만든 것이다. 새로운 화학식으로 완성된 이 재료를 토대로 새로운 비너스가 탄생했다. 머리와 팔다리가 없는 훼손된 형태, 또 너무나 훼손되기 쉬운 석고상이지만 가장 깊고 순수하며 빛나는 색을 띤다는 데서 수많은 해석과 의미를 부여받는 현대미술품이다.


저자는 이 같은 '재료 속에 담긴 한 편의 시'에 매료됐다. 예술과 일상 속 스쳐 지나가기 쉬운 '재료'가 건네는 이야기에 주목한다. 재료는 곧 원소들의 배합 혹은 화학적 반응의 부산물이다. 그는 "작품에 사용되는 재료는 의미가 숨겨진 암호"라며 "과학적 지식은 이 세상에서 그저 어둠으로 남을 뻔했던, 아니면 어울리지 않는 빛만 존재할 뻔했던 곳을 밝게 비춘다"고 말한다.

클로드 모네, 피에트 몬드리안, 잭슨 폴록, 루이즈 부르주아 등 여러 시대·장르의 미술을 들여다보는 저자의 시선은 미술관 밖으로도 나간다. 가령 엄마의 화장품, 아빠의 면도 크림처럼 인간의 외모를 꾸미는 재료에도 과학과 역사가 담겨 있다. 고대 이집트인은 수지성 나무를 태워 만든 흑연 가루를 연망간석이라는 광물과 섞어 눈의 윤곽을 그리는 데 썼다. 현대적 형태의 간편한 립스틱은 20세기 초 금속 용기가 개발되면서 상용화됐다. 발림성을 좋게 하는 데 왁스, 오일, 안료, 보습제 등이 복잡하게 들어간다.

이 밖에도 누렇게 바랜 종이, 칠이 벗겨진 벽, 흑백사진 등 우리 주변을 관찰한 스물다섯 가지 이야기가 펼쳐진다.


인간 주변의 사물과 예술을 원자 단위로 바라본 저자의 이런 시도는 감성 어린 시선 덕분에 딱딱한 지식 전달에 그치지 않는다.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란 말을 살짝 뒤집어보면 앎을 통해 더 깊어지는 애정과 아름다움도 있는 법이다.

[정주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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