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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색과 녹색 사이, 마오 시대 ‘토’의 과학 담론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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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색과 녹색 사이, 마오 시대 ‘토’의 과학 담론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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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룽현 ‘4단계 농업 과학 실험 네트워크’에 관한 포스터 세트 가운데 여섯번째에 해당하는 이 포스터는 중국 전역 인민공사 내 공공장소에 부착됐다. 포스터의 문구는 “자력갱생, 노력분투” 정책을 찬양하고, 화룽현이 “꾸준히 현장의 자원을 활용하고 현지의 토착적 방법을 사용해” 군중에 기반한 과학적 영농 활동을 추진했다고 높이 평가하는 내용이다. 푸른역사 제공

화룽현 ‘4단계 농업 과학 실험 네트워크’에 관한 포스터 세트 가운데 여섯번째에 해당하는 이 포스터는 중국 전역 인민공사 내 공공장소에 부착됐다. 포스터의 문구는 “자력갱생, 노력분투” 정책을 찬양하고, 화룽현이 “꾸준히 현장의 자원을 활용하고 현지의 토착적 방법을 사용해” 군중에 기반한 과학적 영농 활동을 추진했다고 높이 평가하는 내용이다. 푸른역사 제공


녹색혁명, 1968년 미국에서 처음 사용된 이 말은 사람들로 하여금 배고픔을 잊게 하리라는 기대감을 품게 했다.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나타난 농업혁명은 이전과 비교할 수도 없는 “전례 없는 생산물과 작물”들의 “기록적인 수확량”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의 역사학자 시그리드 슈말저의 ‘붉은 녹색혁명’에 따르면, 녹색혁명은 냉전 시기에 탄생한, 즉 “미국이 반대하는 이데올로기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구사했던 하나의 전략”이었다. 그렇다고 ‘붉은 녹색혁명’이 공산권 국가에 비해 미국의 녹색혁명이 갖는 상대적 우월함을 드러낸 책은 아니다. 오히려 마오쩌둥 통치 시기를 중심으로 중국의 농업과학사에 집중하면서, 그것이 갖는 우리 시대의 함의를 조망한다. 서문에서 그 함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회주의 시대 중국에서 전개된 녹색혁명의 역사는 인류 전체의 미래를 위한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하나의 퍼즐 조각을 대표한다.”



마오 시대 사회주의 중국은 이념과 사상에만 매달리지 않았다. 이념적으로 “가장 급진적인 지도자들”조차 “과학과 근대화라는 이상을 수용”하는 데 앞장섰다. 먹고사는 문제가 이념보다 앞섰다. 사회주의 중국의 당면 목표는 “인민의 생활수준”을 높이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기계, 새로운 종자, 근대적 화학물의 도입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적색혁명과 녹색혁명은, 별개의 사건처럼 보이지만 결국 하나의 목적으로 추진된 일인 셈이다. 한 가지 중요한 개념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마오 시대에는 양(洋)보다는 토(土) 개념의 과학 담론이 우세했다. 토란 “다수의 군중이 사회주의 혁명의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 생산해 낸 과학”으로 “토착적, 중국적, 지역적, 소박한, 군중의, 투박한”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 반면 양은 “외국적, 서양적, 엘리트적, 전문적, 상아탑의”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토와 양을 “생산적이고 협력적으로 함께 이용할 것을 장려”했지만, 사실상 토가 양을 지도했다.



붉은 녹색혁명 l 시그리드 슈말저 지음, 이종식·문지호 옮김, 3만8000원

붉은 녹색혁명 l 시그리드 슈말저 지음, 이종식·문지호 옮김, 3만8000원


푸저룽(蒲蛰龍)은 1949년 미국 미네소타대학교에서 곤충학 박사를 취득한 후 “생물학적 해충방제법을 통해 중국 농업에 기여”한 인물이다. 명문 중산대학 교수였던 그는 “의심할 여지 없는 엘리트”, 즉 양 과학자였지만, 한편으로는 “사회주의에 대한 강한 정치적 헌신과 농민에 대한 애정”을 품은 토 과학자였다. 실제로 그는 1958년부터 1962년 사이, 즉 최대 5000만 명이 아사한 것으로 알려진 대약진 시기에도 “군중의 참여와 심지어 군중에 의한 혁신”을 주장했다. 대약진 운동의 역사적 평가는 냉혹하지만, 지은이에 따르면, 이 시기에 이르러 중국의 “사회주의 과학”이 탄생했다. 인민이 직접 “참여하고 생산하고 활용하는”, 이른바 군중과학을 통해 지속가능한 농업 모델의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마오에게 농민계급보다 중요한 사회집단은 없었지만 녹색혁명을 이룰 만큼 경험이 많지 않았고, 사회 자체가 후진성을 면치 못했다. 마오는 “사회주의 신농촌”을 건설하기 위해 과학지식을 갖춘 “새로운 농민”을 길러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농민들이 과학자들과 긴밀하게 교류할 기회도 빈번해졌다. 하지만 결과는 모호했다. 오래된 기술을 이용할 것인가, 새로운 기술을 사용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갈렸다. 비료 사용이 대표적이다. “농민의 비료-즉 유기비료-를 주력으로, 화학비료를 보조로 하자”는, 다소 애매한 정책이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정책이 애매하다고 일하는 사람들마저 애매하지는 않았다. 각지에서 일한 지방 간부들과 기술원들은 “쉬지 않고 중국 전역을 휩쓸고 있던 보다 큰 혁명적 정치 운동의 파고 속에서 농업 근대화 정책을 집행”하는 데 이바지했다. 기술원들의 자부심은 비교적 높았다. “새로운 농업지식과 실천을 원활하게 전파하기 위해 연구 중심 대학을 떠나 농촌의 일선 기지에서 활동”한 이들은 녹색혁명과 함께 적색혁명의 당위를 중국 전역으로 전파하는 구심점이었다.



이 1964년도 사진은 살충제의 통상적인 취급 방법을 보여 준다. 청년들은 배낭식 탱크를 채우고 있고, 뒤쪽에 있는 청년들은 스프레이를 뿌릴 준비를 하고 있다. 이들은 충칭 살충제 공장 소속 노동자들로, 살충제를 시험해 본 경험을 바탕으로, 농민들을 도와 목화다래벌레를 제거했다. 푸른역사 제공

이 1964년도 사진은 살충제의 통상적인 취급 방법을 보여 준다. 청년들은 배낭식 탱크를 채우고 있고, 뒤쪽에 있는 청년들은 스프레이를 뿌릴 준비를 하고 있다. 이들은 충칭 살충제 공장 소속 노동자들로, 살충제를 시험해 본 경험을 바탕으로, 농민들을 도와 목화다래벌레를 제거했다. 푸른역사 제공




젊은 지방 간부와 기술원들에게 고민이 없지는 않았다. 이른바 “레이펑의 역설” 때문이었다. 레이펑(雷峰)은 1962년, 21살 젊은 나이에 전신주에 깔려 생을 마감한 중국 인민해방군 병사다. 그는 농장과 공장 등에서 헌신적으로 일했는데, 사후 간행된 일기가 중국 청년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삶은 물론 죽음마저도 자기희생적이었던 레이펑 이야기가 역설적인 이유는 “문화대혁명 시대의 청년들은 한편으로 혁명 영웅이 되라는 요구와 다른 한편으로 혁명이라는 기계의 단순한 ‘부품’이 되라는 상반된 요구 사이에서 분투”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중국 사회에서 “지식청년”이라는 이름은 이러한 모순을 투영하고 있다. 한편 지식인으로 간주되는 순간 “그들의 역할은 언제나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는 폐쇄적 사회였다.



마오 시대 녹색혁명은 실패작일 수도 있다. 주지의 사실처럼 대약진 시기 숱한 아사자들이 이를 증명한다. 덩샤오핑 중심의 지도부는 마오가 추진했던 과학, 청년, 경제 등 모든 분야의 급진 정책들을 “거대한 실패”로 규정했다. 하지만 지은이는 “포스트마오 시대의 ‘실패 서사’”가 당대를 향한 온전한 평가라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다. 당대에는 후진성의 지표처럼 여겨진 화학비료와 살충제의 사용을 최소화하고자 했던 노력들이 반세기 조금 넘게 지난 지금, 훨씬 더 선진적으로 평가받는다는 점만 봐도 그렇다. “자력갱생, 농민에게 배우기, 실천에 봉사하는 이론”은 마오 시대 사회주의 중국의 유산이다. 그 유산이 없었다면 오늘날 중국의 농업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 지은이의 주장이다. ‘옮긴이의 말’에서 이종식, 문지호 두 번역자가 지적한 것처럼 ‘붉은 녹색혁명’은 “개발의 방식이 사회적‧환경적 차원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역사적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또한 “어떤 방식의 발전이 지속가능한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유용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장동석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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