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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창모 | 강원도의 왕진의사
1인 가구인 지연(가명)님의 집 냉장고 안에는 음식물 부스러기 사이로 인슐린 펜 주사기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처방받은 펜은 총 다섯개. 왜 마지막 다섯번째 펜을 사용하지 못하고 버려둔 것일까. 수개월 전 펜을 사용하던 중에 그는 당뇨 합병증(망막병증)으로 두 눈의 시력을 잃었다. 맞을 때마다 매번 용량을 맞추어야 하는 인슐린 펜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혈당은 급격하게 올라갔다. 탈수되기 쉬운 여름철. 그는 지하 셋방에서 에어컨도 없이 하루 종일 앉은 채로 더위를 견뎌내고 있다.
저혈당이 의심되어 연속혈당측정기를 부착한 김 할아버지. “저희 가고 나면 점심 식사 챙겨 드세요. 입맛 없으면 우유 한잔이라도 꼭 드셔야 해요!” 신신당부하며 진료를 마치고 나왔다. 하지만 바로 그날 오후. 부탁한 그 우유를 깜박 잊고 먹지 않아 혈당은 60까지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식사와 주사 맞을 시간에 알람까지 맞춰드렸지만 할아버지는 그 이후로도 여러번 저혈당을 피하지 못했다.
처음엔 이해가 안 됐다. 왜들 이러시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6년간 아픈 노년의 삶을 겪어보니 알겠다. 그들이 건강을 ‘잃어서’가 아니라 노년의 건강이 ‘원래’ 그런 것이다. 노인의 당뇨는 점점 인슐린을 맞아야 하는 상황이 되지만 노인의 인지기능과 삶은 점점 인슐린을 맞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세끼 식사를 정해진 시간에 꼬박꼬박 할 수 있는 여건이 되고, 스스로 혈당 측정하는 데 어려움이 없고, 시간 맞추어 하루 한두번 인슐린 주사 맞는 걸 까먹지 않을 만큼 인지능력이 되는 건강한 노인을 만난 적이 없다. 다들 이 과정의 어딘가에서 삐거덕거리거나 이가 빠져 어려움을 겪었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저혈당의 위험에 노출됐다. 정상과 비정상을 굳이 따진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건강한 노년이야말로 비정상이고 아픈 노년이야말로 정상이다. 건강이 아니라 질병이 우리 삶의 조건이듯이.
지연님도, 인슐린 주사 일정에 일상을 맞추어갈 능력을 잃은 김 할아버지도 모두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만 인슐린을 맞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누군가가 이들에게는 없다. 다행히 이런 분들을 위한 특별한 기술적 해결책이 있다. 환자 본인이 인슐린을 따로 주사하지 않아도 기계가 실시간으로 혈당을 확인하면서 필요한 만큼의 인슐린을 알아서 투여해주는 자동 인슐린 주입 펌프(이하 펌프)가 그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들은 모두 이 펌프를 사용하지 못한다. 펌프가 성인 2형 당뇨에서는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보험 적용을 받지 못한 채 사용하게 되면 첫 한달 구매비만 600만원이 넘고 매달 유지비도 25만원 이상 들게 된다. 노인 중에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이들에게만 닥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당뇨 환자 100명 가운데 최소 3명은, 인슐린을 맞아야 하는 상황에서도 시력 손상 때문에 인슐린을 맞기 힘들게 된다. 한국은 30살 이상 인구 중 당뇨병 환자가 600만명이나 되는 나라다.(대한당뇨병학회, 2021)
원격의료와 같은 첨단기술의 필요성을 얘기할 때는 가장 먼저 불려 나왔던 시골 노인과 장애인들. 하지만 정작 그들에게 기술이 필요할 때 사회는 침묵한다. 의료 사각지대에 놓인 그들을 위한다며 원격의료 기업에 수백억원을 지원했던 행정은 정작 추가적인 개발 비용도 필요 없는, 이미 개발된 기술을 그들에게 지원하는 일에는 인색하다.
저혈당은 치매의 강력한 유발 요인이다. 지금 이 시각에도 자신이 저혈당인지도 모르는 노인들이 치매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어제 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하고 식전에 인슐린 주사를 맞으라고 열번 넘게 당부해도 ‘어, 식후에 맞았는데?’라고 반문한다.
정말 보지 못하는 건 누구일까. 직시해야 할 장애인과 노년의 삶을 못 본 체하는 사회야말로 자신의 시력을 잃었다. 이런 치매 유발 사회의 사각지대란 보이지 않는 장소가 아니라 보지 않으려는 행위일 뿐이다.
(지난 5년간 제 글의 독자가 되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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