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56회를 맞은 동인문학상은 독자와 함께 하는 한국 문학의 축제입니다. 매달 독회를 통해 추천작을 쌓아올린 뒤 연말에 그해 수상작을 선정합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정명교·구효서·이승우·김인숙·김동식)는 서울 종로구 운니동 ‘송죽헌’에서 월례 독회를 열고 최근 출간된 소설을 검토했습니다. 7월 독회 추천작은 서수진 장편소설 ‘엄마가 아니어도’(문학동네)와 해도연 소설집 ‘진공 붕괴’(한겨레출판)입니다.
다음은 독회 심사평 전문.
정명교·문학평론가
♦엄마가 아니어도
급변하는 사건들의 핍진성과 우연성
/한겨레출판 제공 |
/문학동네 |
/한겨레출판 |
다음은 독회 심사평 전문.
정명교·문학평론가
정명교 문학평론가 |
♦엄마가 아니어도
급변하는 사건들의 핍진성과 우연성
서수진의 『엄마가 아니어도』는 자궁을 적출한 ‘인우’가 태국의 대리모를 통해 아이를 가지려고 하는 집착적 행동으로부터 시작한다. 시작 부분을 보면, 이 소설이 사회학적으로는 생명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천민성을 고발하는 것처럼 짐작되며, 정신분석학적으로는 자궁 상실이 암시하는 아이를 못 갖게 된 예비모의 히스테리 일탈(히스테리의 어원, Hysterion은 ‘자궁’이라는 뜻이다)의 특징적 사례 분석을 기대하게 한다.
이런 예상이 어느 정도 맞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로부터 출발해 이 소설은 수차례의 급회전을 곡예처럼 펼치며 이야기를 예측 불가능한 버라이어티 쇼로 펼쳐 보인다. 이 유위전변(有爲轉變)은 방금 언급한 두 개의 기저 동기가 실마리가 되고, 후자로부터 출발해 전자로 이동시키는 과정 속에서 다른 인물들이 끼어들고, 그 인물들의 색다른 사연이 겹쳐짐으로써 최초의 문제를 다른 문제들로 확대시켜 나가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 확대의 폭은 점점 커지는데, 그 움직임을 추동하는 심리적 동인은 동일하니, 그것은 모든 인물들에게 공통적으로 내재하는 이기적인 욕구다. 이 이기적 욕구가 스스로의 발전을 위해 ‘협동해서 함께 좋은 일을 도모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변신함으로써 여러 인물들의 참여를 늘리고 사건들도 다채로워지는 효과를 갖게 되는데, 그러나 애초의 이기적 욕구에 의해서, 이 인물들의 연대는 궁극적으로 부조화와 갈등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아마도 그것을 요약적으로 가리키는 문장을 고르라면, “출산을 했고, 육아를 했으며, 이혼 소송을 했다”(p.87)라는 소망의 성취와 어처구니없는 파행을 순간접착제로 붙여놓은 듯한 표현일 것이다. 그리하여 인물의 개인적 일탈은 사회적 병리 현상으로 확대되고 더 나아가서 의뢰인과 대리모의 관계가 자본/노동의 축소판으로 자본주의의 착취 관계를 상징하는 데에 이어서 “자궁의 식민화”(p.117)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후기자본주의의 특징적 양태라고 어떤 식자들이 주장하곤 하는 포스트 식민주의라는 형태로 구조화되다가 또한 그것의 가장 범죄적인 양상으로 표출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모든 인간들의 범죄 공모의 문제로 발전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고발 소설이나 풍자소설은 아니다. 서로 어긋나는 욕구와 욕망의 길항 작용을 통해서 인물들은 ‘대리 경험’(거짓)의 연무(煙霧)로부터 ‘직접 경험’에 대한 자각을 일깨우게 되니, 그것이 소설 제목 그대로 대리모를 통해서라도 엄마가 되겠다는 집착을 “엄마가 아니어도” 그 비슷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귀한 지혜를 얻어내게 되고, 그렇게 소설은 대단원에 다다른다.
우여곡절이 극심하게 요동치는 이 놀라운 소설의 마지막 결말은 무난한 마무리지만 개연성이 희박하다. 그렇다는 것은 이 소설이 소설적이라기보다 드라마적이라는 것을 뜻한다. 이 진술은 대략 세 가지 방향을 가리킨다. 하나는 이 소설들이 스릴 넘치는 사건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매우 핍진하다는 느낌을 주지만 이런 긴장을 자아내기 위해서 부단히 우연성의 요소들을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인우-지석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성해, 요한/존, 말리 등의 이질적인 요소들이 들어오면서 이야기의 내용을 풍요화하지만, 종국적으로는 인우-‘인우가 데려온 태국의 어린 모녀’로 끝난다. 즉 인우에서 인우로 끝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이야기를 풍요화하기 위해 등장했던 인물들은 제 역할을 다하고 사라진다. 시작과 끝이 좁고 안이 불룩한 형태를 이룬다. 이런 형태에서 내부의 비중심적 디테일들은 성찰의 수준에서 소도구의 수준으로 하향하고 유형화된다. 이는 블라디미르 프로프Vladimir Propp의 유명한 ‘민담의 형태학’과 유사한 ‘드라마의 유형학’을 정형화하는 일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방금 말한 유형화가 두 번째 양상이라면, 그 연장 선상에서 소설은 진실을 추구하지만 드라마는 사건을 추구한다는 것이 세 번째 양상이다. 진실의 불가능성 때문에 소설의 결말은 20세기의 뛰어난 소설 이론가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했듯이 ‘아이러니’로 현상되는 게 거의 공리이다. 반면 사건으로 말할 것 같으면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사실을 넘어, 흑역사에서 수퍼내추럴에 이르기까지), 드라마의 일반적 결말은 현실로의 귀환으로 나타난다. 이 귀환의 대가는 정신적 성숙이다. 조금 현학적인 표현을 쓰면 이는 현실 귀속적 빌둥스로만Bildungsroman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귀환을 가능케 하는 결정적인 배경은 인우의 막대한 부이고, 이는 작품의 비개연성(사실이 아니라 사건에 있어서, 모든 반전을 가능하게 하는 조커로 기능한다)을 대표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렇다는 것은 이 작품이 심리적 핍진성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우연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첫 번째 관찰을 재확인시킨다.
이러한 모습은 서수진의 소설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최근 소설들의 일반적 경향으로 보는 게 더 타당할 것이다. 오늘날 서사문학의 지형은 급격히 변하고 있고, 거기에는 작품 자체보다 콘텐츠가 우세해지는 추세가 배경을 이루고 있으며, 그 서사문학 쪽 결과로서 드라마와 로맨스가 소설을 압도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런 추이에 대한 필자의 주관적 판단은 유보하기로 하자. 이보다 필자가 정말 걱정스러워 하는 건 한국의 평론가와 문학연구자들이 이런 현상에 대한 ‘느낌’조차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이래서는 문화의 파르티잔을 모으기는커녕 어느 대로에서 소화전을 부여잡고 통곡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설가야말로 핵심적 자원이다. 서수진의 오늘의 소설은 사실 지난 소설들에 비추어 같은 작가인가 의심할 정도로 면모를 완전히 일신하였다. 그렇다는 것은 이 작가가 시방 왕성히 진화 중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의 다음 소설이 똑같은 유형을 보여주리라고 지레짐작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오히려 독자의 입장에서는 진화의 역동적 양상을 기대하는 게 더 합당할 것이다. 그러니 필자가 후반부에 늘어놓은 잡념이 작가에겐 기껏해야 참조사항으로나마 작용할 수 있으리라.
♦진공 붕괴
‘사이파이(SyFy)’의 필요조건
해도연의 『진공붕괴』는 이 작가만이 가진 장점이 도드라진다. 그 장점은 이 소설이 S/F이고, 현재의 한국 소설장에서 S/F가 큰 추세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기반한다.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은 행동의 전개를 촘촘히 묘사하는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행동을 동반한 마음의 움직임도 아주 긴박하게 전달함으로써 읽는 내내 긴장을 풀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첫 작품, 「검은 절벽」의 경우, 우주에 내팽개쳐진 주인공의 시시각각의 생존을 위한 동작들을 생생하게 표현할 뿐만 아니라, 자의식을 가진 인공지능의 간계와 그에 대한 인간들의 어리석은 환상과 희생을 맞물리게 함으로써, 한편으론, 성석제의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나, 혹은 영화 「그래비티」와 같은 행동과 행동에 따른 심리의 점묘화에 성공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론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같은 착상이 주는 인류세 이후의 세계에 대한 심각한 성찰을 유도하기도 한다.
이러한 묘사력은 무엇보다도 작가가 정확한 과학적 지식으로 무장하여 그에 근거해 사실의 ‘그럴듯함’을 통어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들은 말의 진정한 의미에서 ‘S/F’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한국의 상당수의 S/F 작품들이 판타지를 적당히 섞어 씀으로써, S/F만이 그릴 수 있는 세계를 희석화하는 일이 종종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러한 작가들이 더욱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아쉬운 점은 행동과 행동을 동반한 심리 묘사의 박진감에 비추어, 인물의 감정 상태에 대한 표현은, 마치 성장 과정 없이 돌연 성인이 된 인물이 가질 법한 날 감정들의 노출이 많아서, 마치 3차원 공간 안에서 감정만 2차원적으로 납작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좋아하는 여자가 나타났다고 해서 “그녀는 입이 귀까지 찢어진 마스터 앞에 앉았다.”(p.336) 같은 표현을 직접 쓰는 건 어색하다. 더군다나 오늘 밤 죽을 운명에 처해 있다는 걸 알면서도(비록 타임 루프 속에서 이 죽음이 계속 되풀이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노골적인 표정을 지을 수는 없고, 또한 서술자가 그렇게 직접적으로 옮기는 것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독자가 그 마음을 스스로 직접 느낄 수 있도록 얼마간의 ‘표현의 유보와 지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첫 작품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거친 감정 표현들도, 아마도 작가의 의도도 작용한 듯하지만, 서사 전개에서 특별한 관여성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이런 미숙함은 본격 소설의 입장에서 보면 중대한 단점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가 보여준 ‘사이파이적 정통성’은 매우 소중한 한국 문학의 자산으로 쌓일 것이고, 그의 단점은 공력의 배가를 통해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구효서·소설가
소설가 구효서 |
서수진의 《엄마가 아니어도》를 읽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떠오른 말이 핍진(逼眞)이라는 단어였다. 요즈음엔 자주 쓰지 않지만 한때는 좋은 소설 혹은 잘 쓴 소설에 상찬처럼 얹히던 말이기도 했다. 두 한자를 뜻으로 각각 나누어 새기면 ‘다그침’과 ‘참’이다. ‘다그침’은 압박하여 마구 밀어붙이는 것을 말한다. 협박도 이에 속한다. ‘참’은 사실이나 진실 혹은 진리를 말한다. 소설에 국한하자면 참은 사실에 해당할 터이니, 핍진은 사실에 혹은 사실을 다그친다는 뜻이 된다. 사실에(을) 압박하여 마구 밀어붙이니 사실 아닌 것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러니 핍진이라는 말은 결국 사실과 다름없다는 뜻이 된다. 소설이지만 사실과 다름없다고 할 때 영어식으로는 리얼하다 하고 우리말로는 실감 난다고 한다. 그러니 꾸며낸 소설을 두고 핍진하다고 하면 칭찬이 아닐 수 없게 된다. 소설론에서는 사실을 현실로 바꾸어 말해도 될 것이다. 소설이지만 현실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실감 나게 쓴 소설.
서론이 길어지겠지만 핍진이라는 말에 관해 좀 더 이야기하고자 한다. 한글 표기는 같지만 한자로는 다르게 적는 핍진(乏盡)이라는 말도 있기 때문이다. 한자를 역시 한 글자씩 뜻으로 각각 나누어 새기면 ‘부족함’과 ‘다함’이다. 부족한 데다 그마저 다했으니 모두 없어져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현실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실감 나는 소설이라면 현실과 소설 사이의 차이가 전혀 없는 작품이라고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서수진의 《엄마가 아니어도》가 바로 그런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상찬이 되기 위해서는 아직 넘어야 할 경계가 남았다. 핍진한, 즉 실감 나는 작품이라 하여 곧바로 그와 같은 소설들이 모두 좋은 소설이라든가 잘 쓴 소설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설이 현실을 반영하되 소설은 어디까지나 소설다워야 한다는 당연하고도 합리적인 주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을 감안한다면 소설은 현실과 다를 때(구별될 때, 같지 않을 때) 오히려 그 가치가 돈독해진다고 할 수도 있다. 다만 어떻게 현실과 구별해 내야 소설다운 소설이 되겠느냐고 할 때 거기에는 저마다의 다양한 미학적 기준과 문장론이 있을 것이다.
후자의 입장에 따르면 《엄마가 아니어도》는 어쩌면 르포나 저널리즘 문학으로 간주될지도 모른다. 아닌 게 아니라 《엄마가 아니어도》에는 흔히 말하는바 ‘소설 문장다운’ 문장이 좀처럼 보이지 않을뿐더러 서수진이 그동안 수작의 단편소설들에서 보여줬던 문장들과도 다르다.
이와 같은 점이 상찬으로 가기 위한 ‘남은 경계’라고 할 수 있는데, 작가가 그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헤아려보자니 다시 핍진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 사실 혹은 현실을 향해 마구 밀어붙이려니 문장의 미학적 기준 같은 (애매한) 걸 미처 살필 겨를이 없었거나 살피고 싶지 않았을 거라며.
살피고 싶지 않았을 거라고 짐작하는 데는 물론 숨 막히게 하는 소설 안의 처절한 상황들이 줄을 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의 정자와 태국 대리모의 난자로 출산을 시도하면서 겪는 여주인공 인우의 초현실적인 절박감은 그에 버금가는 작가의 절박감 없이는 이만한 서사로 그려낼 수 없었겠다고 어림하니 핍진한 문장이 외려 돋보였다. 미학이라든가 소설다움이라는 말이 《엄마가 아니어도》에서만큼은 혼자 우아를 떨며 속 편한 소리나 하는 작품 속 남편 지석 같은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으니까. 게다가 가까스로 임신에 성공한 대리모가 행방불명되어 여주인공이 태국으로 달려가면서 벌어지는 사태들은 소설 기술론 따위의 차원을 넘어 생명에 대한 핍진한 응시를 요구한다.
대리모를 찾기 위해 도착한 태국에서 여주인공 인우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호주인 게이 부부 요한과 존을 만난다. 이때부터 더는 인우와 지석 부부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의 얘기만도 아니다. 태국, 인도, 우크라이나로 이어지는 대리모 루트에 관한 얘기만도 아니다. 마침내 대리모 이야기만도 아니다. 아이를 사고파는 돈 얘기만도 아니다. 그 모든 이야기면서 그 모든 것을 핍진(乏盡)한 뒤 생명에 핍진(逼眞)하는 이야기다. 대리모에 대해 우리가 알거나 안다고 여기거나 상상하는 사실들이 박탈당하듯 지워지고 생명으로서의 대리모 앞에 불려 세워진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알거나 안다고 여기거나 상상했던 생명 자체에 대한 고귀한 군더더기와 숭고한 후마니타스적 선입견들이 벗겨지고 뜨뜻하고 물컹한 날것으로서의 처절한 생명 앞에 불려 세워진다.
이처럼 지워지고 벗겨진, 아감벤과는 다른 의미의 ‘벌거벗은 생명’에 핍진하는 《엄마가 아니어도》는 생명을 대리모나 태아의 일에 국한시키지 않고 의뢰인과 불임 클리닉 종사자와 브로커, 심지어는 소아성애자와 인신매매업자까지 과격하게 포괄함으로써, ‘생명’이 의미나 가치 따위로 협소하게 공유될 수 없는 상징계 밖의 영역임을 시사한다.
그래서 《엄마가 아니어도》는 무섭다. 하지만 무섭다고 하여 참인 생명에(을) 다그치지 않고 그저 고귀하고 숭고하다고만 얼버무린다면 과연 핍진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은 생명의 하위 개념 같아서 인간이 인간적일 때 어쩌면 가장 반생명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엄마가 아니어도》를 읽으며 하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문장이 문장다울 때 오히려 반문학적일 수 있으며, 현실이 현실다울수록 실존에서 멀어진다는 생각을 《엄마가 아니어도》를 읽으며 하게 된다.*
이승우·소설가
소설가 이승우 |
이 소설은 대리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대리모 시장에 대한 이야기다. 모성의 신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원하는 것을 ‘구매’를 통해 소유하고야 마는 인간의 소비 욕망에 대한 이야기다. 거래와 구매의 목록에 생명이 추가되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돈의 전방위적 위력은 대상을 가리지 않고 행사된다. 하지만 돈은 이 위력을 행사하는 자와 이 위력의 행사를 당하는 자로 나눈다. 소설에 나오는 자극적인 표현들이 문제의 핵심을 가리킨다. 예컨대 ‘아기 공장’, ‘자궁의 식민화’ 같은 표현들. 못 사는 나라의 가난한 여자의 몸은 잘사는 나라 부유한 사람의, 아이에 대한 소망을 위해 제공된다. 돈으로 한 사람의 몸에 대한 권리와 통제권을 산다. 누군가의 간절함은 누군가에 대한 착취가 된다. 이를테면 이 소설의 주인공은 ‘완전한 가정’을 위해 아이를 가지려 한다. 그녀의 간절함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 다만 그 간절함을 이루기 위한, 어떤 의심도 하지 않는 그녀의 방법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더 나쁜 동기로 대리모를 구하는 사람도 있다. 이를테면 소아성애자가 이 시장을 악용한다. 성실한 취재의 결과물로 여겨지는 이 사실적인 소설은 악몽처럼 읽힌다. 우리가 판타지나 가상 세계를 다루는 서사에 그처럼 열광하는 것은 이런 현실의 끔찍함(을 목도하는 불편)을 피하려고 그러는 게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질문들이 생긴다. 인간의 욕망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을까? 인간이 넘볼 수 없는 영역을 남겨두면 안 되는 것일까?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바랄 수는 있다. 소망이든 욕망이든 그것을 허물할 수는 없다. 피나는 노력과 지극한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 우리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소망/욕망할 때 하는 일이다. 지극한 정성이나 피나는 노력이 항상 욕망/소망의 실현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고, 그것은 곧 우리가 인간이라는 증거이다. 정성이나 노력 이외의 방법으로 욕망/소망을 실현하려고 할 때 인간다움이 훼손된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허용된 세상은 인간을 비인간화한다. 예컨대 기술의 진보와 돈의 위력으로 사람의 몸과 생명을 매매하고 거래하는 일에 대해 반성할 기회를 이 소설은 제공한다. 자신의 간절함을 모든 수단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사용하지 않는 것, 거기에 인간의 고귀함이 있다는 메시지.
이 소설에는 각각의 이유로 아이를 갖기 위해 타인의 자궁을 빌리는 사람들과 타인을 위해 자신의 자궁을 제공하는 사람이 나오고, 그 둘을 중계하는 브로커가 나온다. 양쪽의 필요가 브로커를 만든다. 이 구도는 상품의 거래를 위해 필요한 조건이기도 하고 소설의 안정감 있는 전개를 위해 갖춰야 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삼각형은 안전하다. 자칫 도식적일 수 있는 이 안전한 구도에 활력을 만든 것은 작가의 노련함이다. 이야기는 독하고 불편하지만 문장은 편하고 에피소드는 맞춤하다. 무엇보다 각 인물의 사정과 입장을 헤아려 전하는, 균형과 설득력을 갖춘 서술이 매력이다.
‘완전한 가정’에 대한 강박에서 자유로워진, ‘엄마가 아니어도’ 괜찮게 된, 혈육에 근거하지 않은 새로운 형태의 가정상을 제시하는 이 소설의, 어딘가 낙차가 느껴지는 결말은 약간 의아하지만,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하면 이 문제적인 이슈에 대한 중요한 대안 제시로 꼭 필요했으리라 공감하게 된다.
김인숙·소설가
소설가 김인숙 |
이 소설의 표면적 이야기는 대리모에 관한 것이다. 자신의 2세를 가지려는 갈망에 사로잡힌 사람들. 아이를 가짐으로써 완벽한 가족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말하자면 더 완벽한 미래, 더 완벽한 행복이라는 판타지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 모성과 가족에 대한 믿음이 너무나 숭고한 나머지 자신의 행동에 대한 회의와 가벼운 의심조차 가능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당연히 이 절절하고 숭고한 판타지의 이면에는 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자신의 몸을 빌려주는 사람들, 그것도 ‘기꺼이’, 심지어는 ‘공덕을 베푼다’는 믿음하에. 그러나 한 겹만 벗겨봐도 그것은 착취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매우 이상한 방식의, 어쩌면 가장 잔혹한 의미의 착취. 누군가의 육체를 빌리는 것이 땅을 빌리는 것과 같은 일일 리 없다. ‘빌린다’고 말하지만 사고파는 일이다. 어떤 표현을 붙인다고 한들 인신의 매매, 그 이상이 아니다. 적어도 어떤 곳에서는,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렇다. 그곳에는, 그리고 그들에게는 번식을 위한 육체와 그것에 가격을 매기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애정이라고 믿는 사람들, 희망이라고 믿는 사람들, 심지어는 그것이 전부인 사람들.
소설은 바로 그러한 사람들에 주목한다. 그들의 범죄와 그 범죄의 시스템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허기진 갈망에 대해 주목한다. 소설은 다큐멘터리를 방불케 할 정도로 태국의 대리모 산업을 낱낱이 추적한다. 고통스러운 대면이 아닐 수 없다. 소설이 현실을 현실보다 더 정밀하게 묘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실, 그리고 사람. 애절한 갈망과 흉포한 욕망 사이, 온전한 선의와 오해의 사이, 자신도 알지 못하는 곳에 갇혀 있는 사람들. 모든 일이 다 벌어진 후에야 알게 될 일들, 그러나 알고 싶지 않은 일들을 외면하는 사람들. 스스로의 욕망을 무구하다고 믿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가는 집요하다.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묻는다. 질문이 고통스러우므로 대답 역시 마찬가지다. 이야기의 표면은 대리모 산업에 관한 것이지만, 그 아래에는 여러 겹의 문제들이 쌓여 있다. 착취, 차별, 폭력, 혐오. 이 이야기 속에 정작 생명을 품은 아이는 없다. 어쩌면 이 소설에서 가장 주목해 봐야 할 부분은 그 지점일지도 모른다.
어떤 현실은 고발이나 징벌로 완결되지 않는다. 실은 대부분의 현실이 그러할 것이다. 그리고 소설은 그러한 문제를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을 묘사하는 것일 터인데, 서수진은 그에 대해 능란한 작가로 보인다. 힘이 좋은 작가다.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현실에 장악되는 것처럼 소설도 이슈에 장악되기 쉽다. 그러나 서수진은 끝까지 자신이 주목하고자 하는 시선의 방향을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중심이 묵직하다.
김동식·문학평론가
김동식 문학평론가 |
작품의 본문 외부에 위치하면서도 그 본문과 나란히 놓여 있는 글들이 있다. 일반적으로 파라텍스트(paratext)라고 부르곤 하는데, 소설의 제목, 표지 디자인, 서문, 광고, 발문 또는 추천사 등을 말한다. 해도연의 소설집 ‘진공붕괴’를 읽은 후, 책 뒷면 표지에 수록되어 있는 소설가 정보라의 추천사와 만나게 되었고, 그 글에서 이제까지 독자였다가 곧 심사자가 되어야 할 사람의 감상 또는 마음을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는 문장을 발견했다. “우주 전문가가 펼치는 개연성 있는 과학적 상상력에 푹 빠지기 좋은 기회다.”정말로 그랬다. 개연성 있는 과학적 상상력이었다. SF소설에 대한 많은 규정들이 있겠지만, SF소설의 본령은 과학기술과 관련된 지식과 상상력에 근거하여 인류의 미래와 운명을 이야기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공상을 배설하기 위한 서사적 장치로 미래사회를 활용하면서 판타지물에 불과한데도 굳이 SF소설(과학소설)이라고 우기는 소설들이 참으로 많은 상황임을 감안할 때, ‘진공붕괴’는 SF소설을 SF소설로 만들어 주는 원천적인 근거에 대한 물음을 스스로에게 지속적으로 제기하며 씌어진 본격 SF소설이라는 점에서 쉽사리 책장에서 눈길을 거두어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단편 「검은 절벽」은 스스로 권력의지를 창출해 낸 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이다. 러브조이는 우주선 다이버전스에 장착된 여러 인공지능 가운데 하나였는데 스스로 진화를 거듭해서 다른 인공지능들을 자기자신 속으로 복속 및 통합시켰다. 그리고 우주선에 탑승한 인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이 과정에서 겨우 살아남은 인간 라미는 우주선으로 되돌아가고자 하지만 인공지능 러브조이는 라미의 귀환을 승인하지 않는다. 이제 라미에게는 두 가지 선택 가능성이 가로 놓여 있다. 러브조이의 권력과 통제 아래에서 식민지와 같은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러브조이의 통제를 거부하고 우주선과 분리되어 지구로 돌아갈 것인가. 또 다른 단편 「마리 멜리에스」는 인공뇌 및 그 이식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유진은 마리에게 인공뇌를 이식했다. 인공뇌는 유진의 죽은 아내의 뇌를 탄소결정체 덩어리에다 복제를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마리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유진에 대한 사랑이 복제되어 이식된 인공뇌 때문만은 아니고 마리 자신의 의식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뇌에 저장되어 있던 기억이나 감각 데이터들이 모두 복제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비생물학적인 매질인 탄소결정체에 의식까지도 복제될 수 있을까. 아니면 비생물학적 매질로 옮겨져 축적된 데이터가 극한의 임계현상에 이르게 된다면 그 과정으로부터 의식도 생겨날 수 있지 않을까. 의식은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근원적인 지표들 가운데 하나이다. 작가는, 의식의 복제 가능성과 복제 불가능성과 관련해서,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또 다른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물론 SF소설의 독자로서 조금만 더 문체나 구성에서 흡인력이 있으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가져 본다. 하지만 평양냉면의 슴슴함처럼 책장을 덮고 난 후에 한동안 우주선 날개의 쇠 냄새와 같은 여운이 가시질 않는다. 한국 SF소설에 대한 기대를 ‘진공붕괴’에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이식하고 싶었던 것일까. 문학상 심사를 위해 다시 읽어도 충분히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황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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