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개봉한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의 주인공 김독자는 월트 휘트먼이 ‘풀잎들’에서 “나는 내 길을 간다, 당신의 길이 아니더라도”라고 선언하듯, 멸망한 세계를 향해 자신의 길을 택한다.
김독자가 낯선 세계 속에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읽어나갔듯, 우리 교육도 이제는 정해진 답이 아닌, 현장의 목소리로 다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정책의 말이 아니라 교실의 경험이 중심이 되어야 할 때다.
정부는 언제나 ‘성공’을 이야기한다. 정책이 발표될 때마다 마치 판을 뒤엎는 혁신처럼 포장된다. AI 교과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하는 미래형 교육”, “학생 맞춤형 학습의 전환점”이라는 수식어가 넘쳤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지금, 그 혁신은 왜 교실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는가. 정책의 환상은 남았지만 책임의 실체는 흐릿하다.
영화 속 한 장면에서 아이 길영이는 “개미집을 부쉈으면 책임을 지셔야죠”라고 말한다. 이 한마디는 무책임한 행위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을 요구하는 상징적인 메시지로 다가온다. 디지털 교과서 정책 역시 단 한 번의 결정으로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특히 청소년과 같은 교육 수요자들에게 직접적인 결과로 돌아온다.
이전 정부가 핵심 교육 정책으로 추진한 AI 교과서는 당초 2025년 3월부터 초등학교 3~4학년, 중학교 1학년, 고등학교 1학년의 영어·수학·정보 교과에 전면 도입될 계획이었다. 하지만 검증 부족과 성급한 도입에 대한 교육 현장의 우려가 제기되면서 정부는 학교 자율 도입 방식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이러한 결과가 나오기까지 ‘AI 교과서’를 둘러싼 논의에는 교사와 학생의 목소리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필자는 이전 칼럼 ‘속지 않으려면 속아야 한다: AI 교과서와 기만의 시대’에서 기술 중심 교육정책이 기술 시연에 그칠 위험성을 경고한 바 있다.
교과서는 교육 철학의 결정체여야 하지만, 현재의 AI 교과서는 기술 중심적 접근에 머무르고 있다는 평가가 있다. 보도자료는 넘쳐났고 행사장은 북적였지만, 정작 교실은 조용했다. 그것이 이 정책의 실체였다.
특히 디지털 교과서가 보편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일부 학생들에게는 충분한 배려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었다. 필자가 칼럼 ‘특수학생과 디지털 교과서, 교육 정책과 현실 균형추 찾아야’에서 언급했듯, 모두를 위한 기술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일부 학생들이 배제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창조성의 상실’이다. 이전 칼럼 ‘영화 오펜하이머로 본 창조적 교육, 그리고 AI 교과서’에선 지적했던 것 처럼 “기술은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가 고민됐어야 한다. 학생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보다, 정답을 빠르게 예측하고 복사하게 만드는 시스템은 오히려 학습의 ‘창조적 불확실성’을 억누른다.
가끔은 오답을 고른 선택이 진정한 정답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정답에 얽매이지 않는 사고를 허용해야 하며, 학생 각자의 독창적인 길을 존중해야 한다. 디지털 시대는 이미 시작되었고, 이제 우리는 그 길 위에 서 있다. 학생들이 이 흐름 속에서 디지털 도구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교육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교육은 시험지가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장소여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AI 교과서는 학생을 ‘창작자’가 아닌 ‘소비자’로 길들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책의 한계를 인정하고, 누구를 위한 성공인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정부 정책의 혼란을 극복하고 개선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명확한 가이드라인 마련과 함께 책임 있는 리더십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교육정책은 기술의 시연장이 아니라 학생과 교사, 그리고 교육 현장을 중심으로 한 종합적 검토와 소통을 통해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 교육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정부가 국비5,30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한 AI 교과서 사업은 기술 중심의 교육정책이 현장과의 소통 부족으로 인해 겪는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교육정책의 성공을 위해서는 기술 도입에 앞서 교육 현장의 목소리를 충분히 반영한 단계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우리는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나는 동료들과 함께 이 이야기의 결말을 새롭게 쓰기로 했다.”
김독자의 이 나레이션처럼, 이제는 학생들이 교육 기술의 수용자가 아니라, 방향을 함께 정하는 주체로 참여해야 할 시점이다.
글: 칼럼니스트 조은희(조은희의 조은국어 소장/ 조은국어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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