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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본질을 깨달은 일본 외교 [4강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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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본질을 깨달은 일본 외교 [4강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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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편집자주

요동치는 국제 상황에서 민감도가 높아진 한반도 주변 4개국의 외교, 안보 전략과 우리의 현명한 대응을 점검합니다.

핵심이익 지킨 대미 관세협상
자동차 수출경쟁력 유지 가능
EU와의 연대, 새 행보도 시작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집무실에서 23일(현지시간) 아카자와 료세이 일본 경제재생장관과 양국 무역협상을 타결 후 악수를 하고 있다. 백악관은 X에 이 사진을 게재하며 일본과 대규모 협상(Massive Deal with Japan) 문구를 달아 트럼프 대통령의 치적이라는 점을 부각했다. 뉴스1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집무실에서 23일(현지시간) 아카자와 료세이 일본 경제재생장관과 양국 무역협상을 타결 후 악수를 하고 있다. 백악관은 X에 이 사진을 게재하며 일본과 대규모 협상(Massive Deal with Japan) 문구를 달아 트럼프 대통령의 치적이라는 점을 부각했다. 뉴스1


7월 23일 오전 8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SNS를 통해 "일본은 상호관세로 미국에 15%를 낸다"고 발표했다. 지난 2월 첫 정상회담 이후 8차례 장관급 회담 끝에 관세 협상이 타결된 것이다. 철강·자동차에 대한 일방적 관세 압박, "일본은 매우 버릇없다"는 트럼프의 도발적 언사, "우리가 호구로 보이냐(なめられてたまるか)"는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반박까지 감안하면, 이 합의는 예상을 뒤엎는 급반전이었다.

합의의 핵심은 상징성과 실익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다. 일본은 미국에 5,500억 달러에 달하는 투자를 약속했고, 미국은 자동차 25% 관세를 절반인 12.5%로 낮추기로 했다. 기존 2.5% 기본세율과 합산해 실질 자동차 관세율은 15%로 확정됐다. 농업 분야에서도 일본은 기존의 무관세 수입의무물량 77만 톤 안에서 미국산 쌀 비중을 확대하는 데 합의했다. 이 중 약 45%는 이미 미국산이 차지하고 있어, 정치적 부담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조정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이번 결과를 두고 일본이 '굴복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자동차와 쌀은 일본 정치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역린’이다. 자동차는 전체 수출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연간 20조 엔 이상 외화를 벌어들여 에너지 수입을 감당하는 핵심 산업이다. 노동자의 약 10%가 관련 산업에 종사할 만큼 고용 파급력도 크다. 쌀은 자민당의 지지 기반인 농민층과 직결된 정치적 쟁점이다. 특히 고이즈미 신지로 농림수산장관이 주도한 비축미 방출 정책에 대한 반발로 이번 참의원 선거에서 농민 표심이 이탈했고, 주로 농촌 지역인 1인 선거구에서 자민당은 다수 지역을 야당에 내주었다.

일본은 자동차 관세 전면 철폐를 고수했으며, 쌀 수입 확대는 협상 테이블에 올리는 것조차 꺼렸다. 그러나 결국 두 분야 모두에서 일정한 양보를 선택했다. 이를 일본 정부는 '전략적 피벗'으로 해석한다. 평행선을 달리는 대신,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양보 가능한 카드는 조정하고, 핵심 이익은 지켰다는 판단이다. 자동차 관세는 15%로 인상됐지만, 환율 여건을 고려하면 감내 가능한 수준이다. 이를 반영하듯 자동차 관련 종목이 상승세를 보이며, 일본 주가는 1년 만에 4만1,000엔대를 넘어섰다. 쌀도 의무수입물량 범위 내에서 미국산 비중만을 조정하는 데 그쳤다.

이번 협상은 일본 외교의 인식 전환을 보여줬다. '동맹국' 지위만으로는 더 이상 예우를 기대할 수 없다는 냉엄한 현실이 확인된 것이다. 2월부터 철강·자동차 관세 면제를 요청했고, 4월에는 주요국 가운데 가장 먼저 협상에 나섰지만, 성실한 대응이 외교적 보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번 협상의 본질은 세율 조정이 아니다. 트럼프가 주도해 온 새로운 통상 질서가 본격화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는 규칙보다 거래를, 동맹보다 실익을 중시한다. 일본은 과거처럼 동맹국 특별대우를 기대하며 접근했지만, 새 규칙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전환을 상징하듯 협상을 타결한 그날, 일본은 유럽연합(EU)과 '경제판 2+2' 협의체 출범을 선언했다. 공급망, 디지털, 위성, 기술 표준 분야에서 협력을 확대하는 '경쟁력 동맹' 구축은, 대미 의존을 완화하고 유럽과의 연대로 외교적 선택지를 넓히려는 전략이다. 낡은 공식을 접고, 새 질서 속에서 균형점을 모색하는 일본의 진로가 구체화되고 있다.


이창민 한국외대 융합일본지역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