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D 프린팅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미니어처가 호르무즈 해협과 이란을 표시한 지도를 가리키는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
존 페퍼 | 미국 외교정책포커스 소장
정전이 발생하면 때론 모두가 협력해 질서를 유지한다. 취약한 주민을 돕고, 일시적인 혼란에 대처할 방법을 찾기도 한다. 하지만 반대로 무정부 상태로 변하기도 한다. 많은 이들은 지금 세계가 후자와 가깝다고 본다. 러시아와 이스라엘은 약한 이웃 국가를 침공하고,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은 세계경제를 마비시키는 무역전쟁을 시작했지만 유엔 같은 국제기구는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너무 많은 위반으로 인해 더 이상 규칙을 지킬 의미가 없어져 버린, 어떤 전환점을 지나 버린 것일까? 무정부 상태가 세계의 미래인 걸까?
냉전 시기 양극 체제는 겉으로나마 안정을 제공했다. 덕분에 유럽은 통합할 수 있었고, 한국과 일본 같은 동아시아 국가들은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으며, 제3세계 국가는 양대 초강대국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며 자신들의 위치를 모색할 수 있었다.
하지만 냉전 체제는 표면적으로만 안정적이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세계는 자주 충돌했다. 한국·베트남에서의 전쟁, 캄보디아 집단 학살, 비아프라(나이지리아 일부에 존재했던 국가)·방글라데시 기근, 라틴아메리카·아프리카·아시아에서의 군사쿠데타 등이 그 예다. 그 시기 안정과 번영을 누린 것은 오직 ‘글로벌 노스’ 국가들뿐이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수십년 동안 법치와 인권 보호를 기반으로 한 국제 공동체가 정립됐다. 유럽연합(EU)이 확대되고, 미-러 관계가 잠시 해빙기를 맞았으며, 중국이 급속한 경제성장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세계질서에서도 혼란은 있었다. 보스니아와 르완다의 집단 학살, 걸프전, 9·11 테러와 아프가니스탄·이라크에서의 전쟁, 수단 학살, 1997년 아시아 경제위기,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 등이 이어졌다.
오늘날 대부분 국가는 여전히 국제 규칙을 따르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와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사건을 제소하고 있고, 국제형사재판소(ICC)는 여전히 체포영장을 발부하며, 최근에는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 같은 유명 인사도 구금했다. 미국이 참여하지 않더라도, 브라질이 올해 기후 협상을 다시 활성화할 수 있다는 신중한 낙관론도 있다.
무정부 상태에 대한 두려움은 현재보다 미래를 향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처럼, 세계의 상당 부분이 극우로 전환한다면 어떻게 될까? 확실히 미국, 러시아, 헝가리, 인도, 엘살바도르에는 우파 민족주의자들이 정권을 잡고 있다. 극단주의자들은 독일과 프랑스에서도 세력을 넓히고 있다. 이는 유럽연합이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에서 멀어지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칠레, 콜롬비아, 브라질, 멕시코에서 좌파 정권을 출범시킨 라틴아메리카의 ‘핑크 웨이브’도 아르헨티나의 하비에르 밀레이와 에콰도르의 다니엘 노보아의 승리 이후 ‘브라운’으로 변색될 위험이 있다.
일부에서는 트럼프가 세계질서를 19세기 제국주의 시기의 영향권 분할 체제로 유도하고 있다는 추측도 한다.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 중국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러시아는 옛 소련 지역, 유럽은 유라시아 일부와 아프리카의 일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림이다. 하지만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하다. 트럼프의 미국은 여전히 전세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란을 폭격하고, 우크라이나에 무기 지원 패키지를 제공하며, 중국과의 대결을 위한 군비 지출을 확대하고 있다. 중국 또한 ‘일대일로’를 통해 전세계 인프라 개발과 광산 프로젝트에 투자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여전히 우크라이나와 몰도바를 포함한 옛 소련 지역까지 회원국 확대를 추진 중이다.
대부분의 경우 세계를 움직이는 규칙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영국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가 제1차 세계대전 직후를 묘사하면서 언급한 ‘순수한 무정부 상태’가 세상에 퍼진 것은 아니다. 문제는 앞으로다. 미국 작가 리베카 솔닛은 ‘정전’ 상황에서 대중은 협력하면서 새롭고 해방적인 해결책을 찾아낸다고 설파했다. 그의 이론은 곧 세계적 차원에서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이 세계의 트럼프들이 틀리고, 그가 옳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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