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제헌절인 7월 17일 저녁 서울 용산구 한남동 관저에서 우원식 국회의장(왼쪽 셋째), 김민석 국무총리(맨 왼쪽) 등과 만찬장으로 입장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
“인생에 홀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신의 발자국 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그가 지나갈 때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외투 자락을 잡아채는 것이 정치인의 임무다.”
19세기에 독일을 통일한 ‘철혈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어록입니다. 정치인은 우연처럼 다가온 순간을 역사의 필연으로 만들어내는 지혜와 역량을 갖춰야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실제로 20세기 말 헬무트 콜 총리는 베를린 장벽이 갑자기 무너진 사건을 놓치지 않고 통일을 밀어붙여 독일 통일을 다시 이뤄냈습니다. 대단한 정치인들입니다.
김종인 전 의원이 자주 사용해서 유명해진 ‘별의 순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독일어로 슈테른슈툰데(Sternstunde)입니다. 점성술에서 왔다고 합니다. “미래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결정적 순간이나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지금 신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별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개헌 얘기입니다.
1948년 헌법 제정 뒤 1987년까지 39년 동안 아홉 차례 개헌이 이뤄졌습니다. 독재, 시민혁명, 군사정변에 의한 개헌이었습니다. 부끄러운 역사입니다.
1987년 마지막 개헌으로 우리나라는 비로소 민주주의 국가가 됐습니다.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가 여러 차례 이뤄졌습니다. 대통령이 두 번 탄핵을 당했지만 헌정이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헌법이 정한 규칙에 따라 질서를 회복했습니다. 전 세계가 우리나라 민주주의 회복력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헌법을 바꿀 때가 됐습니다. 1987년 이후 무려 38년이 지났기 때문입니다. 지금 헌법으로는 기후 위기, 저출생 고령화, 지방 소멸, 인공지능 시대에 제대로 대응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윤석열 같은 괴물 대통령의 출현을 근본적으로 막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1987년 개헌은 전두환 독재에 저항한 시민혁명과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등 정치인들의 결단으로 이뤄졌습니다. 그 뒤 여러 차례 개헌 시도가 있었지만 실패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나라 대통령제는 심각한 경직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제입니다. 미국보다 더 심한 승자독식 권력구조입니다.
조금 자세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권력의 최정점인 임기 초에는 절대로 개헌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개헌 논의가 자신의 권력을 훼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임기 말에 힘이 빠지면 개헌을 제의합니다. 하지만 이때는 차기 대통령 자리에 다가선 정치인들이 개헌에 반대합니다. 1987년 이후 지금까지 이런 패턴이 반복됐습니다. ‘네버 엔딩 스토리’입니다.
그런데 이런 패턴이 깨지는 놀라운 장면이 펼쳐졌습니다. 지난 7월 17일은 제77주년 제헌절이었습니다. 이날 오전 10시 1분 이재명 대통령이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습니다.
“77년 전 오늘, 국민의 뜻으로 만들어진 우리 헌법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주권재민의 대원칙을 당당히 천명했습니다. 위대한 대한국민은 숱한 역경과 시련을 이겨내며 법전 속에 머물던 헌법 정신을 현실에서 구현해냈고, ‘K-성공의 신화’라는 놀라운 역사를 써내려갔습니다.
초유의 국가적 위기였던 12·3 내란조차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평화롭고 질서 있게 극복해냈습니다. 전 세계가 감탄한 우리의 회복력 역시 국민이 지켜낸 헌법 정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계절이 바뀌면 옷을 갈아입듯, 우리 헌법도 달라진 현실에 맞게 새로 정비하고 다듬어야 할 때입니다. 대한민국을 이끄는 나침반이 될 새 헌법은 아픈 역사를 품고, 정의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선언이어야 합니다. 국민 모두의 꿈과 염원이 담긴, 살아 움직이는 약속이어야 합니다.
‘5·18 민주화운동’ 헌법 전문 수록, 국민 기본권 강화, 자치 분권 확대, 권력기관 개혁까지. 지금 이 시대가 요구하는 헌법의 모습입니다. 국민의 대표인 국회가 ‘국민 중심 개헌’의 대장정에 힘 있게 나서 주시리라 기대합니다.
개헌 논의 과정에 국민의 뜻이 충실히 반영될 수 있도록 대통령으로서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주권자인 국민의 의지가 국정 전반에 일상적으로 반영되는, ‘국민이 주인인 나라’로 향하는 길이라 굳게 믿습니다.”
같은 시각 국회에서 제헌절 경축식이 열렸습니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경축사에서 개헌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무 길어서 중요한 대목만 소개하겠습니다.
“민주주의에 완성이 없듯이 헌법도 한 번의 개헌으로 완성될 수 없습니다. 변화하는 시대적 과제와 국민의 요구를 담아내며 끊임없이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본격적인 개헌 추진 시기는 여러 상황을 두루 살피면서 판단하겠습니다. 대내외 경제 여건과 향후 정치 일정, 인수위도 없이 출범한 정부가 안정화되는 시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정부 구성이 완료되고, 시급한 민생과 개혁 과제가 가닥을 잡아가는 시기가 바람직합니다. 당면 현안을 어느 정도는 매듭지어가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동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올 하반기에는 ‘국회 헌법개정특위’를 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단 한 가지를 개정하더라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좋습니다. 천릿길을 시작하는 첫걸음이기도 하거니와 개헌의 성사가 정치의 복원입니다. 개헌이 개혁이고, 개헌이 민생입니다. 개헌을 통해서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개혁과 민생의 제도적 기반을 만들어갑시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7월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77주년 제헌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
어떻습니까? 바로 이런 경우를 위해 부합(符合)이라는 단어가 존재합니다. 두 사람이 미리 짜기라도 한 듯 내용이 일치합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우원식 국회의장은 윤석열 대통령 파면 이틀 뒤인 지난 4월 6일 “이번 대선에서 권력구조 개편을 포함한 개헌 국민투표를 동시에 하자”고 제의했지만 엄청난 비난에 시달린 뒤 사흘 만에 거둬들인 적이 있습니다. ‘내란 종식 우선’이라는 여론에 밀렸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때 우원식 국회의장의 개헌 제의는 이재명 당시 대표와 충분한 논의를 거친 뒤 내놓은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재명 대통령은 우원식 국회의장에게 매우 미안해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실은 이번 제헌절을 앞두고 국회의장의 제헌절 경축사 내용 파악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제헌절 아침 이재명 대통령이 먼저 페이스북 글로 개헌의 물꼬를 터준 것입니다.
두 사람은 17일 저녁 김민석 국무총리, 강훈식 비서실장과 만찬을 함께했습니다. 수해 때문에 술 대신 오렌지 주스를 곁들인 식사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우원식 국회의장이 제의한 ‘순차 개헌’과 ‘추석 전후 국회 개헌특위 구성’에 전적으로 공감한다는 뜻을 밝혔다고 합니다.
어쨌든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재명 대통령이 먼저 개헌을 제의한 것은 그 자체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정말 파격적인 결단입니다. 역대 대통령 중에 이런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1년 뒤 대통령의 국가원수 지위를 삭제하고 4년 연임제로 바꾸는 개헌안을 발의했지만, 국회에서 야당의 투표 불참으로 폐기된 일이 있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개헌안 발의는 실제로 개헌을 하려는 목적보다는 모범적인 개헌안을 한번 만들어 보려는 목적이 더 컸다고 합니다.
이재명 대통령의 개헌 제의에 언론은 매우 긍정적입니다. 7월 18일 치 대부분의 조간신문은 환영하는 사설을 실었습니다.
“낡고 좁은 ‘헌법 개정’, 국회 골든타임 놓치지 말라”(경향신문)
“이 ‘국회가 개헌 대장정 나서 달라’…여야 지체할 이유 없다”(동아일보)
“이 대통령의 개헌 제안 환영한다”(중앙일보)
“이 대통령이 띄운 ‘개헌’, 국회 논의로 이어지길”(한겨레)
이제 남은 과제는 실제로 개헌을 완수하는 일입니다. 절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두 가지 걸림돌이 있습니다.
첫째, 새로 선출되는 여야 대표 변수입니다. 민주당은 8월 2일, 국민의힘은 8월 22일 새 대표를 선출합니다. 이들이 반대하면 개헌은 어렵습니다. 정청래 의원은 “내란 정당 해산”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김문수 전 후보는 대선 때 “대통령 임기 3년 단축과 2028년 대통령과 국회의원 동시 선출”을 공약했습니다. 이런 강경론이 당내에서 득세하면 개헌은 물 건너갑니다.
둘째, 내년 지방선거 변수입니다. 국회 개헌특위가 합의를 이뤄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지방선거 때 개헌 국민투표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야 어느 한쪽이라도 국민투표가 지방선거에서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판단하면 국민투표를 거부할 것입니다. 국민투표를 못 하면 개헌은 안 됩니다. 2028년 총선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개헌은 고난도 과제입니다. 바로 그래서 신의 도움과 별의 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재명 대통령의 결단으로 열어젖힌 개헌의 기회를 우리가 꼭 붙잡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치부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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