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지난달 17일 차별금지법 제정을 국정과제로 채택할 것을 촉구하는 시민 1만여명의 서명을 모아 대통령실에 제출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제공 |
김정희원 |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극우의 폭력은 이미 한국 사회에 도래해 있다. 다만 불균등하게 분배되어 있을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그 폭력이 삶과 죽음의 문제인 반면, 누군가에게는 “나중에” 생각해도 되는 부차적인 사안에 불과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안일함과는 달리, 취약한 집단을 찾아내 조준하는 것은 대단히 쉬운 일이다. 그들을 상대로 혐오를 부추기거나 폭력을 가하는 것은 심지어 쾌락을 가져다준다. 굳이 “여자에게 학문은 필요 없다”는 메시지를 남기며 여대에 폭탄을 설치했다고 협박하는 그 기분, 학생들이 황급히 대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기분 말이다.
한편 극우 개신교는 정부가 손을 놓고 있는 사이에 ‘성경적 성교육’을 주력 사업으로 펼쳐왔다. ‘미국 직수입 태아 모형’을 판매하며 여성의 재생산권을 부정하고, 생물학이라는 미명하에 반지성주의에 기반한 성별 고정 관념을 주입한다. 선천적으로 여성은 빨간색을, 남성은 파란색을 좋아한단다. ‘젠더’ 개념은 “진짜 여성”에 대한 억압이라고 주장하며, “동성애는 죄악”이라며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설파한다. 때마침 인터넷을 점령한 여성혐오 콘텐츠는 마치 죽이 척척 맞는 공모자들 같다. 초등학생들이 즐겨 쓰는 틱톡은 일찌감치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가르치며, 이미 답이 정해진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을 각인시킨다. 온통 성차별적 이미지로 가득한 ‘쇼츠’는 절망적이다.
파시즘 연구 100년사를 일관되게 관통하는 내용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극우 세력이 새롭게 복원하고자 하는 ‘조국의 질서’에는 반드시 ‘남성성’과 ‘여성성’이 동원된다. 그들에게 젠더는 그 자체로 질서이자 위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젠더 규범은 퇴행하고, ‘남성 피해자 담론’이 등장하며, 성차별과 여성혐오가 확산된다. 성차별과 여성혐오는 가부장제의 재생산을 위한 필수 기제다. 성차별은 남자와 여자를 구별 짓지만, 여성혐오는 여자와 여자를 구별 짓기 때문이다. 즉, ‘착한 여자’와 ‘나쁜 여자’를 구별 짓는다. 따라서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충실히 따르지 않는 여자는 처벌 대상이 된다. 여자가 짧은 머리를 하고 있다는 이유로 “페미니스트는 맞아야 한다”며 폭행했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극우의 폭력은 언제든지 발현될 수 있고, 우리는 그 대상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다. 여성, 퀴어, 트랜스, 난민, 이주민, 화교·중국인을 포함해, 국면에 따라 혐오와 폭력의 새로운 과녁이 떠오를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경고를 울리는 사건들은 충분히 많이 발생하지 않았나? 특히 젊은 세대는 각종 혐오 콘텐츠에 무한대로 노출되어 있는데, 정부는 놀라울 만큼 무심하다. 모든 국민을 위하는 정부가 되겠다고 하면서, 언제나 누가 뒷전인지 너무나 분명하다. 그렇게 “나중에”의 범주에 묶인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은 불굴의 인내와 ‘자기방어’의 감각으로 버티고 있지만 과연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얼마 전 서울 대림동에서 극우 세력에 맞서 연대 집회를 열었던 사람들처럼, 선제적으로 이 세계를 지켜내는 적극적 실천을 꾸준히 해나가는 이들이 있다. 극우의 폭력에 사후적으로 반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뿐만 아니라 그때는 이미 늦기 때문이다. 새 정부도 할 일을 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차별, 혐오, 폭력이 어느 수위까지 도달했는지 직시하고, 이런 폭력에 우선적으로 노출되는 이들을 정책적 고려의 핵심으로 삼아야 한다. 이것이 극우의 성장을 막기 위한 첫번째 전제다. 즉, 정부는 취약한 이들의 편이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고, 이들과 함께하는 실질적 정책을 세워야 한다.
정부는 연결고리를 찾지 못하고 있지만 성평등 정책, 성평등 교육, 그리고 차별금지법은 극우화에 대항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대림동에 모인 사람들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외친 이유이기도 하다. 여성가족부는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시혜성 정책을 펼치는 곳이 아니라, 모두의 존엄과 평등을 위한 고귀한 기준점을 세우고 전 사회가 그 기준에 도달할 수 있도록 압력을 가하는 곳이다. 당연히 모든 부처가 성평등과 차별금지를 위해 협력해야 한다. 우리에게 더 이상 방임할 시간은 남아 있지 않다. 극우화의 미래, 충분히 막을 수 있다. 단, 정부가 제대로 일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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