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에 한 어른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 그 당시 내가 바로 드릴 수 있는 것은 말뿐이라 감사 인사만 거푸 했다. 정신없는 인사에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딱 다섯 글자로 답했다. “다 네 복이야.” 그날 이후로 ‘복’은 내 삶의 중요한 지표가 되었다. 나 역시 많은 감사의 인사를 주고받아왔지만, 단 한 번도 그렇게 산뜻한 대답은 해본 적이 없었다. 머쓱해하거나 손사래 치며 별거 아니라는 듯 내 호의를 축소하고, 어색함을 재빨리 덮는 데 익숙했다. “네 복”이라니. 감사를 부담이 아닌 축복으로 돌려주는 멋진 태도라니. “천만에”라며 내 행위를 부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상대에게도 내게도 좋은 장면이 아닌가! 그 순간 알았다. 난 이 말을 평생 잘 써먹을 거라고. 많은 사람에게 꼭 나눠줄 거라고. “잘 봐, 그게 바로 네 복이야.”
그 이후로 ‘네 복이야’는 내가 가장 아끼는 주문이었다. 친구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냉큼 그 말을 꺼냈다. “네가 복이 많아서 그래!”라고 말하는 순간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상대가 모르고 있던 주머니 속 5만원권을 찾아준 기분이랄까. 내가 받은 축복을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어주고 있다는 고양감에 취해 “네 복이야”라는 말을 습관처럼 10년쯤 하고 다녔다. 부러운 상황에서도 “다 네가 복이 많아서 그런 일들이 찾아오나 보다”라는 문장을 마치고 나면 어느덧 질투가 축복으로 변해 있었다. 장기간 걸쳐온 ‘네 복이야’ 프로젝트는 꽤 오랫동안 내 정신건강을 지켜주었다.
‘복’이라는 말은 여전히 참 좋다. ‘행복’보다 ‘복’이 더 좋다. 행복은 상대적이라 쉽게 불행으로 변하기도 하고, 행운과 헷갈리는 날도 많다. ‘복’은 좀 더 단단하다. 행복이 날씨라면 복은 토양이니까. 하지만 아무리 단단한 토양이라도, 험악한 날씨가 계속되면 비옥함을 잃듯 생활의 난도가 높아질수록 ‘복’이 위로해주던 마음의 면적이 줄어들었다. 오히려 ‘아이고, 내 복이야’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날이 늘어난다. 돌잡이로 떡에 쌀을 찍어 먹었으니 먹을 복은 있을 텐데. 그날의 퍼포먼스만 믿고 내 현실적 허기를 방관하는 건 무책임하고, 복에만 기대기엔 이 세계가 지나치게 복잡하고 불확실하다. 언제든 나를 일으킬 수 있었던 위로와 축복의 주문을 다시 찾아야 할 시기다.
매일 긴장의 연속인 회사, 분투의 나날인 육아, 생업과 의무에 짓눌렸다는 생각이 들 때쯤 찾아오는 ‘대 현타’의 시절을 통과 중인 요즘의 나에게 더 이상 ‘복’은 믿을 구석이 아니다. 오늘 내가 의지할 곳은 ‘복’이 아니라 나다. 내가 써온 ‘애’다. 지금껏 요행을 바라지 않고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온 나의 ‘애’. ‘몹시 수고로움’이라는 뜻의 바로 그 ‘애’. 이제 나는 타고난 ‘복’ 대신 내가 이뤄온 ‘애’를 믿으면서 나아갈 시기를 맞이했다. ‘복’이 있다는 말보다 ‘애썼다’에서 나오는 빛이 지금의 내게는 더 간절하다. 겸허한 자세로 ‘복’을 구하기보다 세상과 더 맞서고 부딪히면서 치열하게 애를 써야 한다. ‘뭘 저렇게까지 애를 써’라고 말했던 그 ‘저렇게까지’를 해내야만 비로소 나를 깨끗하게 축복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또 어느 날, 한동안 감흥이 없었던 복이 ‘쑤-욱’하고 고개를 들면서 나를 반겨줄 날이 오지 않을까? 그 수고로운 만남을 기대하며 나는 명랑하게 애를 써보겠다. ‘복’과 ‘애’를 건너 또다시 나를 일으킬 위로와 축복의 언어를 업데이트하기 위해서.
2015년부터 빅데이터로 라이프스타일과 트렌드를 분석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넥스트밸류>(공저), <말의 트렌드>(2022)를 썼다.
<시리즈 끝>
정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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